나는 5대 장손 맏며느리다.
그리고 우리 남편은 귀한 막내아들이다.
나는... 외며느리다.
결혼 전 남편은 1년에 한두 번 집에 간다고 했다.
명절에나, 그것도 안 갈 때가 더 많다고.
나는 모든 집안 행사에 함께했다.
설, 추석, 시제, 제사, 벌초, 김장, 두 분 생신에 항상 참석했다.
그리고 병원 필수 정기 검진만 해도 네 번이다.
그것만 열두 번.
가끔 주말 방문까지 하면 더 늘어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시누이 생일이면 그의 엄마가 올라왔다.
가끔은 사위와 손녀 생일에도 올라오면 함께 식사했다.
형님과 한동네에 살아, 자주 보는 생활이 처음엔 좋았다.
손녀가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면 가끔 함께 오기도 했다.
횟수로만 따져도, 1년에 족히 스무 번은 만났을 것이다.
가끔은 여행도 갔다.
"아이고~ 고맙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효자다, 참말로."
고마움이 아들 몫이라는 건 기꺼웠다.
서먹하던 부자 관계도, 소원했던 모자 사이도 조금씩 풀려갔다.
그의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위아래로 누나 하나뿐인 귀한 아들은 장남이자 막내이다.
사촌 동생들과는 나이 차이가 컸고, 결혼도 아직이다.
나는 맏며느리이자, 외며느리였다.
누구도 내게 의무를 강요한 적은 없다.
다만, 책임감이라는 철창을 스스로 걸어 잠갔다.
나는 북적이는 가족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서로 온기를 나누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주고받음 없는 일방향의 관계는 나를 점점 지치게 했다.
'내가 왜?' 질문이, 한참을 돌고 돌아 뒤늦게 스쳤다.
두 번째 유산, 초인종, 팥죽. 그리고 시누이의 출산.
짧은 시간 동안 겹친 일들이 내 안에 반항심을 키웠다.
반항이라는 말은 거창하지만, 그의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 감정은 내게서 가장 먼저 ‘쓸모없는 노력’을 걷어갔다.
필수로 가야 하는 행사와 병원 동행 외에는, 방문을 자처하지 않기로 했다.
매번 가기 싫다고 인상 쓰는 남편을 달랠 일도 사라졌다.
감정 낭비를 삭제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젠 부모님 뵈러 가자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 시간만큼 우리 둘 사이에 여유가 생겼다.
"여보, 그러지 말고, 내려가자.
여보, 어머님께 말 조금만 더 예쁘게 하면 안 돼?
여보, 같은 말이라도 요기 힘 풀어봐. 응?
여보, 그러지 말고,
여보, 그러면 안 돼..."
돌이켜본 나는 잔소리하는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타인을 억지로 끼워 넣기를 멈추자, 오히려 관계가 편안해졌다.
그의 엄마가 '요즘은 주말에 뭐 하느냐.' 묻는다.
어째서 오지 않는지, 서운함을 내비쳤다.
"말 꺼내면 그이가 짜증 내고, 싫어해서요."
"그래도 니가 잘 달램시로 그라냐?"
"...이제 안 할래요. 싸우기 힘들어요."
그 말은 사실이다.
다만, 왜 나만 애써야 하냐는 속마음은 잘 감추었다.
환영받지 않은 발걸음을 설득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의 엄마도 알고 있다.
내가 아들을 어르고 달래 데리고 간다는 걸.
화난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중재하는 이도 나라는 걸, 이미 안다.
착한 며느리가 되어 사랑받으려 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만만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던 건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게 당연하다 여겼을 뿐이다.
내가 먼저 가자고 하지 않으면, 편해지겠지.
내가 착한 껍질을 벗는 순간, 그의 엄마는 자식과도 멀어진다.
못된 마음이 틈만 나면 올라왔다.
내 안에서 자라난 작은 악의가 투정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녀석을 잠재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연휴 첫날이면 늘 시댁에 갔다.
휴일이 얼마나 길든, 첫날부터 시부모님과 시간을 보냈다.
그게 친밀해지는 방법인 줄 알았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면 밤이 늦었다.
자연스레 친정엔 다음날 가서 하룻밤만 자고 오는 게 루틴이 되었다.
엄마가 전라도 교외에 집을 마련했다.
어쩌다 보니 시댁에서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였다.
결혼 후 네 번째 추석.
가족들이 세컨하우스로 오기로 했다.
전라도 시댁에서 서울 친정까지, 이동하는 피로를 줄이라는 배려였다.
“여기서 보내시는 첫 명절이니까, 처가도 당일에 가자.”
그의 뜻을 시부모님께도 미리 말씀드리고, 점심 식사 후 출발하기로 했다.
뒷정리가 끝난 오후.
시누이의 재촉에 앞치마를 벗었다.
"쯧, 진짜 벌써 가불라고야."
그의 엄마가 내게만 들리게 조용히 혀를 찼다.
아들에게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으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매, 서운하다잉."
당일에 친정에 가는 건, 결혼 후 처음이었다.
그의 엄마가 서운해했고, 나는 결국 서러워졌다.
그의 엄마의 딸은 연휴 내내 엄마 곁에 있었다.
몇 달이 흘렀다.
연휴가 끝난 지 한참이다.
서러움은 그대로 남아 불쑥 나를 건드렸다.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마늘을 까다 갑자기 칼을 내려친, 이상한 날이기도 했다.
나는 새끼손가락에 붙인 밴드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보, 이제 명절은 하루 전날에 가자.
친정에도 당일에 갈래."
그동안 나는, 부모 피하는 아들을 달래 억지로 시댁에 다녔다.
기가 찬 취급에도 웃음을 그려냈다.
스스로를 깎아가며 감당하던 그 무게를, 이제는 내려놓으려 한다.
아무도 바란 적 없던 일은 이쯤에서 접는 게 맞다.
더 솔직해지자면, 그의 엄마를 위한 마음이 더는 생기지 않는다.
시누이의 출산... 그래, 그때부터였다.
지나간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땐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기억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제 와서야, 서럽고 억울하고, 한없이 분했다.
아물지 못한 마음이, 자꾸만 뜯기고 있었다.
어렵게 꺼낸 말에, 남편은 가볍게 답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란 듯이.
"그래. 그렇게 해. 난 당연히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