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쳐버린 걸까.
남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들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에이씨!"
그저 저녁상을 차리던 중이었다.
나도 몰래, 나지막한 거친 말이 입 밖으로 넘치고 말았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루루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달려왔다.
두 발로 서서 내 다리에 매달려 운다.
작은 몸이 파들거렸다.
내가 더 놀라 그 아이를 얼른 안아 들었다.
주먹만 한 머리통이 내 목덜미를 미지근하게 파고들었다.
삐약거리는 작은 울음소리에 위안이 번졌다.
난 화가 나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편이다.
당연히 욕설도 입에 담지 않는다.
무심코 뱉은 '에이씨'는 아마 견생 처음 들어본 소리일 테다.
그런데도 무엇을 알고 이러는 건지, 반응이 심상찮다.
아마 저 깊은 데서 밀려온, 내 감정의 밀도를 느낀 모양이었다.
"놀랐어? 미안해. 엄마 괜찮아."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격하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포옥, 깊은 한숨에 안도가 묻어난다.
덩달아 내 어깨도,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 녀석이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이야.
진정된 루루를 내려놓고, 저녁 준비를 마저 했다.
오이지는 비치도록 얇게 썰어 꽉 짜내 무쳤다.
육수를 끓여 섞은 된장에 박아 놓았던 무는, 들기름만으로도 충분하다.
마늘장아찌 무침과, 몇 가지 마른반찬도 꺼냈다.
보기만 해도 짠 내가 나는 것 같아, 슴슴한 계란찜을 냈다.
식탁 위를 염분에 점령당한 듯한 차림이다.
남편이 젓가락을 들며 웃었다.
"오늘은 장아찌 정식이야?"
"오전에 형님네 다녀왔어.
어머님께서 두고 드실 밑반찬이 없을 것 같아서"
그의 엄마는 둘째 외손녀를 돌보기 위해, 딸네 집에 올라와 지내는 중이다.
첫째 예은이의 반찬은, 돌보미 햇님이 만든다고 들었다.
어르신 입에 맞는 반찬이 없을까 싶어, 챙겨다 드리곤 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한 반찬은 싱거워서 그의 엄마 입에 맞지 않는다.
이런 장아찌를 꺼낼 때나, 도토리묵을 쑤면 갖다 드리는 게 전부다.
가끔 조카가 좋아하는 주먹밥용 후리카케나, 잔멸치볶음을 해다 주기도 했었는데,
애기 반찬에 간을 너무 안 한다고 몇 번 얻어들은 이후로 손을 뗐다.
그러잖아도 자주 놀러 오던 조카를 부르지 않은 지도 오래다.
예은이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계란 볶음밥을 주문하곤 했다.
간장을 살짝 두른 계란 볶음밥과, 생채소 스틱은 완벽한 아이의 취향이다.
소금만 살짝 뿌린 소고기구이 역시, 쌈장에 찍어주면 먹지 않는다.
일부러 신경 써 따로 차린 조카 밥을, 그의 엄마가 한술 떠서 맛봤다.
간도 안 하고 찍어 먹을 것도 없이 대충 차려서, 맛대가리 없다고 혼이 났다.
"난 원래 이렇게 먹는 거 좋아하는데..."
어린것이 눈치를 살폈다.
그날이 조카를 우리 집에 데려온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양념에 묻어두고, 절여 두었던 장아찌들이 맛나게 익었다.
서툴게 시작한 살림이 제법 주부 태가 나서 뿌듯했다.
조금씩 나눠 담아, 들고 가는 길.
날씨가 좋았다.
내 기분도, 오늘만큼은 꽤 맑았다.
식탁 위에 나뒹구는 김밥 반토막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햇님 휴가라 나 심심한디, 쪼까 올래?"
예쁜 둘째도 안아보고, 말동무도 해 드릴 겸 오랜만에 반찬을 챙겼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마침, 현관을 나서던 사돈어른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갔다.
돌보미 대신 사돈어른이, 요즘 오전에 방문하시는 모양이다.
식탁 위.
종이 포장에 감싸인 김밥 반토막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땅한 반찬이 없었나, 마음이 짠해졌다.
"김밥 드셨어요?"
"아나. 이것은 너 먹어 부러라"
데구르...
먹다 남은 김밥이 내 앞으로 성의 없이 굴러온다.
나는 조용히 그걸 옆으로 밀어 두고, 들고 온 반찬을 냉장고에 넣었다.
"김밥 사드실 줄 알았으면 조금 일찍 올 걸 그랬나 봐요."
"아니여, 예은이 점심으로 그냥 같이 먹었는디,
나는 배가 안 고파서 다 못 먹었시야.
니가 먹어서 치워불믄 쓰것다. 버릴란께 아깝다야."
멈칫.
숨이 가빠졌다.
남은 음식을 떠넘겨서가 아니다.
고춧가루 묻은 먹던 밥도, 내 그릇에 떠넘기는 분이다.
고이 먹고 남은 가지런한 김밥은, 오히려 양호한 편이다.
"예은이... 김밥 사 먹이셨어요?"
"응, 요즘에 햇님 없응께야?
김밥 딱, 사서 둘이 점심으로 늘 먹어.
아~주 간단하고 좋다야.
나 김밥 좋아한께 갠찮해."
그의 엄마가 본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하게 웃는다.
'세상에 애기한테 김밥을 사멕이고 자빠졌단다.
니가 얼른 김밥 좀 싸다 줘 부러라.'
얼마 전, 같은 입에서 나왔던 말이 우습게 떠올랐다.
아니, 우스워진 건 나였다.
어머님은 왜 사 먹이셨을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말을 참자, 호흡이 차올랐다.
잔 숨을 억지로 누르며, 서둘러 그 집을 빠져나왔다.
어디를 어떻게 걷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혼몽했다.
정신이 흩어졌다.
이마 한가운데에 의식을 밀어 넣듯, 몰입하려 애썼다.
코끝이든 어디든 한 점에 집중하고 싶었다.
쉽지 않다.
지금, 이 호흡을 붙잡지 못하면, 또 길에서 무너질 것 같았다.
허겁지겁 카디건을 벗어 재꼈다.
눈앞이 흐려진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구급차 안이었다.
구급대원의 옷자락을, 손이 희게 질리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기억이 끊겨 있었다.
토막 난 장면들이 빠르게 점멸했다.
그 틈 사이로 수치심이 비집고 나왔다.
손가락이 쉽게 펴지지 않는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다, 피가 몰려드는 저릿한 감각과 함께 손이 겨우 떨어져 나왔다.
“ㅈ...송합니다...”
말없이 장아찌를 꼬득꼬득 씹던 남편이 말했다.
"오늘 거기 가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날 가만히 들여다보는 눈빛 온도가 높다.
괜히 뜨끔해서 시선을 돌리고, 밥을 밀어 넣었다.
"뭐 하러 거길 자꾸 가? 가지 마."
"응"
"말로만 대답하지 말고."
남편의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평소 같으면 기분을 긁혔을 법한데, 괜히 웃음이 났다.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이 좋아하는 계란찜을 가깝게 밀어주었다.
'아니야, 진짜 안 가.
도우미가 쉬든 말든, 반찬이 있든 없든.
이제 진짜 내 알 바 아니야.'
입 안에 가득 밀어 넣은 밥 덩이와 함께, 속에 든 말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