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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한 노력도, 쉽지 않다.

by Zei
무심코 바질페스토가 발린 빵을 한입 먹다 죽을 수도 있다.
항생제가 불가피한 약물 치료는 숨넘어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저 평온한 하루를 보내기 위한 노력 한걸음이... 내겐 위협이 되었다.


"아주 약한 약물부터 써봅시다. 일단, 7일..."

처방을 설명하던 의사에게 스마트폰 메모장을 펼쳐 보였다.
장장 5페이지에 달하는 알러지 리스트였다.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뭣도 모르고 살았었다.
겨우 몇 해 전부터 약을 먹을 때마다 증상을 기록해 두기 시작한, 내 생명줄인 셈이다.

정신과 약물치료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불안이라 해야 할지.
아직 우려되는 약물은 없는 것 같았다.



"위장이 많이 민감하신 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도 흔히 사용하는, 가장 순한 약이에요.
초기 처방이니까 아주 소량만 드려볼게요.
…여기 메모에 데파스정 이력이 있으시네요?"

의사는 빼곡한 메모 기록을 꼼꼼히 타이핑하며 물었다.

나는 과거 페니실린계 항생제 투여 시, 과도한 면역반응을 보였던 임상 이력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데파스정을 처방받았던 내용을 덧붙였다.

의사는 그 내용을 전산에 옮겨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계열 약물은 아니지만 데파스정 내약성이 좋으셨다면,

아마 괜찮으실 거라 여겨지거든요?
그래도 혹시라도 안 좋다 싶은 반응 있으시면
바로 중단하고, 전화 주세요"



불안한 마음에 비급여 진료를 받고, 현금으로 결제했다.

집에 오자마자 약 봉투부터 벗겨냈다.
겉면의 약 정보는 은폐해야 했다.
퍼즐 맞추기조차 불가능하게 찢어, 깊숙한 곳에 버렸다.
약은 그가 절대 열지 않는 화장대 서랍에 넣었다.



침대에 옆으로 누워 스마트폰을 들었다.
내 증상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검색해 봐도 전혀 모르겠다.

의사의 말도 솔직히 그리 미덥지는 않다.
굳이 약을 먹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벌떡 일어나 약을 다시 꺼내 들었다.
키친 타월에 둘둘 말아 지퍼백에 넣어, 내용물을 숨겼다.
쓰레기통 페달을 밟아 뚜껑을 열었다.

"사회 기능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약을 버리려는 순간 떠오르는 말이, 손끝을 붙들었다.

"감정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오래 아플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나연님이 아픈 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니까...
아무도 몰라주잖아요.

나연님은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 조절을 잘해서 문제인 거예요."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다고.
의사의 말투, 표정, 숨을 고르던 타이밍까지.
그 문장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되살아났다.



매일 아침 1회 복용 약과, 심한 불면시 선택 복용 약 1정이 따로 처방되었다.
아침은 아니었지만, 아직 오전이니까.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2분 돌리는 동안, 물김치를 국처럼 펐다.
들어가지 않는 밥을 김칫국물에 꿀떡꿀떡 넘기고, 약봉지 하나를 뜯었다.

그리고 쪼개지는 두통에 종일 시달렸다.
애매하게 점심쯤 시작된 통증은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졸릴 수 있다고 했는데, 오히려 불면에 시달렸다.
심한 불면이나 불안시에 먹으라던 추가 복용 약은, 무서워서 먹지 못했다.



그날 밤은 꼭 선득한 악몽 같았다.

뒷골이 쪼개진다는 표현이 이런 걸까.
밤새 뒤통수 하단과, 목덜미가 몸부림치게 아팠다.
심장이 목에서 두근거리고, 온몸의 터럭이 곤두서는 감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전에 먹은 약으로 밤새 부대낄 수가 있나.
약발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 뒤일 텐데.
약물 부작용인지 아닌지 아리송했다.

밤새 끙끙 뒤척이는 통에, 남편까지 잠을 설쳤다.
이른 새벽 기상 알람이 울릴 즈음에야, 겨우 선잠이 들었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침대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는 실루엣이 꿈결처럼 몽롱하다.

"이따 꼭 병원 가 보고, 전화해."

남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꼭 잡아주고 출근했다.




새벽녘 겨우 잠들어, 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을 뿐이다.

지난밤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해졌다.
피곤한 것 말고는 딱히 힘든 부분이 없어서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면 전화하라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지만, 확신이 없었다.

결국 또다시, 마루타가 되었다.

아침밥은 원래 안 먹는데 약을 먹기 위해, 라면을 하나 끓였다.
억지로 젓가락을 움직이다 반도 못 먹고, 싱크대에 쏟아부었다.
영 찜찜했지만, 설마 하며 약을 삼켰다.

반응을 살피느라 스스로 너무 예민하게 만든 탓일까.
어젠 괜찮더니, 이번엔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혹시 라면 때문인가.



과민함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루루와 산책을 나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3분의 2쯤을 단숨에 들이켰다.

속이 차갑게 식자 잠시 진정되는 듯했으나, 착각이었다.
전조도 없이, 역류한 차가운 무언가가 가슴팍에 가득 차올랐다.
본능적으로 상체를 화단으로 향했다.

폭발하듯 커피가 뿜어져 나왔다.
익숙한 반사작용에 눈이 번쩍 띄었다.
동시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뇌리에 꽂혔다.

‘와 씨, 이거 거부반응 맞네.'

우습게도, 나는 그 격렬한 분출을 보고서야 인정했다.
체해서 꾸역대는 토사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푸딩이나 달걀흰자를 먹으면 이런 식이었다.
이건 내 몸이 보내는 분명한 경고였다.

그리고...
역시, 떨림이 시작됐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루루의 산책 줄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원장님께서 일단 복용 중단하시고,
가능한 한 빠르게 내원하시면 다시 처방 내려주신대요."

간호사의 차분한 말투와 언밸런스한 하이톤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아슬하게 짚어냈다.
공중에서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한올한올 들어 올리는 것 같다.
두피를 벅벅 긁어봤지만, 당연하게도 성에 차지 않는다.

멀찍이 선 의식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루루의 밥과 새 물을 챙겨주고 집을 빠져나왔다.
비척비척 병원으로 가던 길 중간, 벤치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아직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운전을 해선 안 될 것 같고, 택시가 잡힐 것 같은 거리도 아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목 뒤에서 등줄기를 타고 등허리 딱 가운데까지, 느낌이 야릇하다.

꼭 생선 지느러미가 돋아난 것만 같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어깨에서 팔뚝까지, 정확히 대칭이었다.

그리고 골반부터 허벅지 중간까지, 너무 정확해서 오싹했다.

무언가가 돋아난 그 감각은 치 떨리게 차가웠다.


집으로 돌아갈까, 왔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필 단지 끝자락에 있을 게 뭐람.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이, 오늘따라 아득하다.




알러지에 익숙한 나로서도, 쉬이 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응급실을 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 앱을 켜고, 액정 위에서 손가락이 갈피를 찾지 못했다.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했다.

고작 목적지 설정 하나조차 버거웠다.


다시는 민폐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내손으로 119를 누를 줄이야.

전화기를 귀에 댄 채, 한참을 기다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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