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가 사춘기 이긴다며.
이 화딱지가 갱년기 증상 아니면 뭔데.
웃겨 진짜
임신을 준비하면서 몇 년 동안 다녔던 산부인과를 오랜만에 찾았다.
"안녕하세요. 나연씨 오랜만이에요.
요즘 좀 어때요?"
"...저 아이 안 갖기로 했어요. "
" 그래, 잘 생각했어~ 우리 그럼 이제부터 호르몬 약 먹으면서 근종 관리합시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여의사는 쿨하게 끄덕였다.
내가, 이 병원을 다니는 이유다.
그녀는 내게 일어난 일을 흔한 감기처럼 대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 선생님, 저 아무래도 갱년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조금 긴 대화를 나눴다.
항상 예약 환자가 붐비는 강남의 유명한 산부인과다.
예약해도 30분은 기본, 1시간 넘게 기다릴 때도 많았다.
진료는 늘 짧고 빠르게 끝난다.
하지만 오늘따라 진지한 얼굴로 여러 가지를 물었다.
늘 막힘없이 말하던 사람이, 이번엔 잠시 멈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알다시피 나연씨 나이에 비해 에스트로젠도,
AMH도 모두 낮은 수치이고,
감정기복, 열감, 두근거림 같은 증상은
호르몬의 변화로 인한 증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책상 너머의 표정이 낯설었다.
익숙한 미소인데, 이상하게 좀 뜨끈하다.
쿨내를 풍기던 평소 모습은 아니었다.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위로가 있었고, 설득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차라리 갱년기이고 싶었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별일 아니야.
근데 나는 산부인과 의사잖아.
내 전문이 아니니까, 전문가와 상담을 받아보라는 거예요.
배 아프면 내과 가고 팔 부러지면 정형외과 가고 그런 거지.
똑같은 거야."
계단을 내려가다 계산을 안 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길, 마지막 계단쯤에서야 엘리베이터가 떠올랐다.
차량 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발레 데스크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경로를 이탈하여,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도착 예정 시간보다, 30분은 더 돌아 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날 이후, 모든 일상이 산만해졌다.
시작한 일을 끝맺지 못한 채 어수선하게 다른 일을 했다.
이것저것 벌여 놓고,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평온한 주말이었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TV를 보는 남편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크게 웃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끔, 작게 새어 나오는 웃음.
4차선 도로 쪽, 앞 베란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웅웅대는 자동차 소음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고요 아닌 고요.
그제야, 혼자가 되었다.
정리된 재활용 쓰레기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맥주 캔을 맨발 뒤꿈치로 밟았다.
납작해질 때까지 콱콱 눌렀다.
탄산수병, 생수병도 마찬가지였다.
비닐은 북북 찢었다.
다시 꾹꾹 눌러 담았다.
버리려던 미니 건조대를 분해했다.
플라스틱 관절을 떼고, 잘 빠지지 않는 건 망치로 두들겼다.
부술 수 있는 것들은 다 부쉈다.
이제 남은 건, 철봉 한 줌뿐이다.
그것들을 굳이 부러뜨리기 위해 힘을 쏟았다.
발로 밟고, 손으로 당겼다.
속이 빈 탓인지 의외로 쉽게 부러졌다.
쪼그려 앉은 자세였다.
반투명 유리문 너머, 남편의 눈에는 평범해 보이겠지.
그저 쓰레기를 정리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딴엔 난폭한 발산이었다.
어딘가를 향한.
아니, 어디에도 닿지 못할 울분.
이마에 열이 맺혔다.
화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이번엔 봉의 양 끝을 쥐고, 팔 힘으로 휘어 보았다.
입안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휘몰아쳤다.
팔은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더 세게.
뚝.
막대가 부러졌다.
파괴의 희열이었을까.
아니면, 피부가 뜯긴 고통이었을까.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왼쪽 팔뚝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 이런, 좀 깊네.
투두둑 떨어지는 피를 보자 조금, 정신이 또렷해졌다.
넓은 사각 타일 사이로 피가 고여 흐른다.
조용히 수습하긴 어려워 보였다.
"아야! 여보~"
"또 왜? ...악! 이게 뭐야!"
뒤늦게 큰소리를 내어 도움을 청했다.
한숨 쉬며 문을 열던 남편이 놀라 달려 들어왔다.
다친 나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며 허둥댄다.
휴지를 한 뭉텅이 뽑아주다가, 안 되겠는지 수건을 들고 왔다.
그의 손엔 이미 차키가 들려있었다.
응급실 밖에서 열을 재고, 코로나 관련 문진을 마친 뒤에야 접수를 할 수 있었다.
고통과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들 사이에서, 나만 불청객 같았다.
환부가 욱신거렸다.
기다림은 길어졌고, 통증도 깊어졌다.
나도 아픈데...
이깟 아픔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배 아프면 내과 가고, 팔 부러지면 정형외과 가고 그런 거지.
똑같은 거야.'
왜였을까.
갑자기 여의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의 정신건강은 어떤 상태일까.
궁금한 한편, 전혀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들춰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더욱 태연한 얼굴을 그려냈다.
"파상풍 주사는 작년에 봉합하러 응급실 오셔서 맞으셨네요. 그럼 됐고...
얼마 전에도 봉합하시고 가셨네요?
어이구야... 오늘은 어쩌다 이랬어요?"
차트에서 시선을 거둔 의사가, 내 상처를 열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매끄럽지 않은 너덜한 상처에서 또 피가 비어져 나온다.
톱니처럼 뜯긴 상처는 결국, 여섯 바늘을 꿰매고서야 다물렸다.
욱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보이지 않는 뒤꿈치가 아프다.
아마 캔을 밟다 다쳤을 인대는, 한동안 남몰래 날 괴롭혔다.
피부의 상처는 오래지 않아 아물었다.
흉이 질 거라던 의사의 말대로, 아직 절반쯤의 흔적이 남아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옅어졌다.
하지만 내 속은 아직 지혈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