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와 공경은 배웠다.
참는 것도 미덕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를 보호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의 엄마는 아들에게는 전화도 맘 편히 걸지 못했다.
지금도 용건이 있으면 아들이 아닌, 내게 전화한다.
신혼 초부터 아들과 부모님 사이를 가깝게 하려고 애써왔다.
결혼 후에 모자 관계가 개선된 것만은 사실이다.
마음을 다하면 나 또한 마음을 받을 거라 착각했다.
며느리 덕에 우리 아들과 사이가 좋아졌다는 고마움은 바라지도 않았다.
살다 보니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좋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상대방도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주거나.
반대로 좋은 사람을 만만히 여겨 함부로 대하거나.
"남편이 효자라 힘들다."는 말이 있다.
그냥 두었으면, 나는 팔자 좋은 며느리였을까.
덜컥 나서서 바꾼 건 나였다.
그러니 후회도 우습지, 누굴 탓하겠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내 안에서 조금씩 부패했다.
멈추고 싶었지만, 감정은 이미 날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걸음, 두 걸음.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다.
찰박, 찰박.
발끝부터 젖어들기 시작한 감정은 계속해서 발아래 고였다.
시간이 축적된 만큼 고인 감정이 결국 부패하기 시작했다.
내딛는 걸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들러붙었다.
눅눅하게 젖은 감정 아래, 혐오가 피어올랐다.
얕은 숨이 잦아졌다.
가슴이 조여들었고, 손끝이 저릿했다.
내쉬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선 채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쪼그려 앉았다.
무릎을 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만 들이마셔야 하는데 멈추기가 어렵다.
내쉬어야 했다.
입술이 말랐다.
머릿속이 점점 흐려졌다.
불쑥.
겨드랑이 사이로 주먹만 한 머리통이 비집고 들어왔다.
회색 강아지가 기어코 내 눈앞에 존재감을 디밀었다.
삐약, 삐약.
작은 비명처럼 울며 얼굴을 핥았다.
"엄마 괜찮아."
그 한마디와 함께, 숨이 빠져나갔다.
할짝할짝.
뽀뽀의 숫자를 셌다.
여섯 번 동안 들이키고,
열두 번 동안 내쉰다.
그동안 터득한 방법이다.
자꾸 중간에 몇 번인지 숫자를 잊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루루의 뽀뽀는 멈추지 않으니까.
다시 처음부터 한번, 두 번, 세 번...
나의 호흡이 안정되자, 하찮은 무게감이 어깨에 얹어졌다.
녀석이 내 왼쪽 목덜미에 머리통을 꾹 눌러 기댔다.
넋 놓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루루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히-후-."
루루의 큰 한숨 소리에 의식을 찾았다.
가방과 산책용품들이 내 주변에 산란하게 널려있었다.
땅에 떨어진 것들을 수습해 간신히 일어서 집으로 걸었다.
미지근한 털 뭉치가 내 다리에 매달렸다.
아직 덜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나는 그 아이를 안아 들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박동이 평소보다 빨랐다.
나는 호흡의 템포를 파들파들 겨우 붙들고 있는 주제에,
불안해하는 루루를 쓰다듬었다.
부풀었다가 줄어드는 가련한 숨결이, 내 호흡과 겹쳤다.
그 규칙적인 들썩거림에 나의 숨도 차츰 정돈되었다.
이 작고 여린 생명이 날 다시 붙들었다.
끈덕지게 바닥으로 들러붙던 발걸음의 무게감도 달라졌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 했나.
아니, 그랬으면 더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나는 나조차도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가끔은 덜 마른 빨랫감 같기도 했고,
때로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어 무서울 때도 있었다.
휴대전화 최근 검색어 목록에는
심리상담센터와 정신과 의원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어떤 도움을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
도저히 혼자서 찾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의 이런 상태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가족에게는 더욱.
밴드 감긴 새끼손가락이 욱신거렸다.
며칠째, 시댁에서 가져온 마늘을 까는 중이었다.
대단히 많은 건 아니었지만, 살림하는 손이 대체로 느린 편이다.
결혼 후 첫해에 호기롭게 햇마늘 한 접을 깠다가, 손목을 해 먹었다.
해본 적 없는 일이라 요령 없이 비틀어 댔더니 인대가 망가졌다.
껍질을 벗기는 속도가 영 시원찮을 수밖에.
집 안이 냄새로 가득 찼다.
"네, 어머님 쉬세요."
그의 엄마와 통화가 끝났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너무나 평범해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고무 대야를 과도로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윗가슴 어딘가가 뜨거웠다.
거실에 펼쳐 놓은 신문지와 대야, 양푼이 시야에서 거슬렸다.
발로 툭, 차면 시원할 것 같았다.
과격한 소리에 놀라 뛰어온 루루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을 정리했다.
까다 만 마늘은 세탁실에 내놓고, 청소기를 돌렸다.
깐 마늘은 지퍼백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 양푼과 칼은 설거지했다.
뽀득, 뽀득. 과도를 닦던 손이 느려졌다.
뽀드득,... 삭.
새끼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실수였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빠르게 뒷정리하고 손가락에 밴드를 감아 지혈했다.
왜 인지, 루루가 내 발치에서 떠나지 않는다.
두근. 두근.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호흡도 그 리듬을 따라 달려 나갔다.
마늘 냄새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비척비척 일어나 온 집안의 창을 모두 열었다.
8차선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와 함께 매연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메스꺼움이 심해지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대로 누워버리고 싶기도 했고,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다.
어지러운 와중에 작은 몸뚱이가 꼼지락거리며 파고들었다.
그래. 산책을 가자.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왔다.
17층에서 내려와, 엘리베이터를 벗어나는 시간이 억겁 같았다.
세계 조경상을 수상한 아파트의 정원은 훌륭했다.
숨어있기 좋은, 인적 드문 곳이 아주 많다.
숲속을 걷는 듯한 산책로에서, 루루의 발걸음이 나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멍한 듯도 했고, 머릿속이 복잡한 듯도 했다.
무언가가 어지러이 떠오르는 것 같았으나, 정리되지 않았다.
밴드 감긴 새끼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현듯, 피가 뚝뚝 떨어지던 싱크대가 떠올랐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앞서던 루루가 멈춰 서더니, 날 돌아봤다.
달려오는 뭉텅이가 뿌옇게 흔들린다.
시누이의 출산 이후부터 시작된 증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