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사 지낼 자손이 없는 불효자

by Zei
자기들이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젯밥 차려줄 자손이 필요한 거겠지.
진짜 조상 잘 만난 사람들은 지금 다 비행기 타고 있어.


고민을 해 보기로 한 이후 남편의 설득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항상 나는 임신을 조르고, 남편은 회피만 했었다.
제대로 된 대화는 결혼 후 처음이었다.



설득의 시작은 여행의 축소였다.

'아이가 생기면 지금처럼 자주 해외여행은커녕,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아무 데도 못 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수긍이랄 것도 없었다.
내게 별 타격이 없자, 이번엔 생활비 공격이 들어왔다.

'아이를 낳으면 이만큼을 더 저축해야 하고,
그만큼 생활비는 빠듯해질 거야.'

우리보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도, 두셋씩 낳아서 잘만 키우지 않나.
내 마음에 미풍도 일으키지 못했다.





비 오는 주말.
드라이브를 하던 중이었다.
남편이 문득 물었다.

"아이가 그렇게 갖고 싶어?"
"응."
"아이 없으면 안 될 만큼 낳고 싶은 거라면,
시험관 그거 해 보자."

깜짝 놀라 돌아보는 내게 남편이 급히 덧붙였다.

"근데 정말 진지하게,
네 마음 하나만 두고 생각해 봐.
아이가 없으면 슬퍼서 안 될 만큼 엄마가 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책임감이나 죄책감, 편견 때문은 아닌지."

차분한 남편의 말에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난 정말 순수하게 아이를 갖고 싶었나?
정말 내가 아이를 원한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편견.
5대 장손 외며느리의 책임감.
그리고 늦어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엄마가 되고 싶은가?'
'나는 엄마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나?'

쉽게 결론짓지 못했다.
말없이 생각이 깊어지는 내게 남편의 조용한 설득이 이어졌다.

평생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은 부모님이 아닌 우리 둘이라고.
잔소리를 100% 다 막아 줄 순 없지만, 최대한 커버해 줄 수는 있으니.
모든 책임감은 잠시 미뤄두고, 네 마음만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아이가 없으면 불행할 것 같아?"

주변의 압박이 없다고 가정해 보았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게, 정말 엄마로서의 삶이었을까?
무언가 묵직한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렇다면 이 우울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정말 아이가 없어서 슬퍼서일까,
아니면 눈치가 보여서일까.

처음으로 깨달았다.
슬픔은 부재가 아니라, 시선으로부터 왔다.



엄마들은 말한다.
이런 희생과 고통은 당연한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우는 기쁨이 가장 크다고.'

나는 아직 겪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막연히 그럴 거라 짐작만 했다.
나에게도 모성애가 있었다면, 똑같이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직은 엄마가 되어보기 전이다.
아직 모성애가 장착되기 전의 나는, 엄마의 마음보다 이기적인 마음이 더 컸다.
알지도 못하는 키우는 기쁨보다는, 당장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내 안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책감만 느끼고 있었다.

내 안의 솔직함과 처음으로 직면했다.
하지만 마음의 방향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내가 가장 걱정하고 두려운 부분은 시부모님이었다.
대가 끊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그리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부모님께 말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5대 장손씨의 답변은 한없이 가벼웠다.

"자기들이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가끔 이뻐만 하면 되니까 쉽게 이야기하는 거야.
장손은 무슨, 젯밥 차려줄 자손이 필요한 거겠지.
우리 제사상 차려서 절하고 있을 때,
진짜 조상 잘 만난 사람들은 비행기 타고 있어.

누가 들을 까 겁날 만큼, 그의 말은 가차 없었다.
아니, 솔직히 속 시원했다.
마침, 착한 며느리가 싫어지던 시기였다.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네, 누구 좋으라고.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3년의 불화가 무색했다.
볕에 널어놓은 스포츠타월처럼, 고민은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생각보다도 더 덤덤했다.
너무 홀가분해서, 오히려 허탈할 정도였다.
언제 그리 붙잡고 있었냐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본투비 차일드프리처럼 조용히 리프트에 올랐다.
솟아오르는 해방감 옆으로, 허탈함이 스치듯 내려갔다.

"어른들로부터 정말 보호해 줄 거야?"
"응, 이사부터 가자."

keywor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