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간편한 조리법은 며느리 버튼이다.
삐- 백미 취사보다 간편한 며느리 김밥.
밀폐 용기 안에는 크래미를 듬뿍 넣은 유부초밥이 들어있었다.
커다란 접시를 꺼내 보기 좋게 옮겨 담고, 앞 접시도 꺼냈다.
잘게 자른 김치는 작은 종지에 조금만 담아 놓았다.
가쓰오부시 육수를 낸 미소 장국을 한 그릇씩 담아내자, 남편이 식탁에 앉았다.
"갑자기 웬 유부초밥이야?"
"그냥 오랜만에 좋잖아"
"응, 좋지. 마누라 유부초밥 맛있지."
남편이 씩 웃으며, 한 덩이 크게 베어 물었다.
그도 나도 좋아하는 메뉴이니, 나쁠 것 없다.
녹진하게 들러붙는 단상을 걷어내고 장국을 들이켰다.
그날도 관성처럼 그의 엄마와 통화 중이었다.
그나마 주말과 공휴일에 잠잠한 이유는, 아들이 무서워서다.
"은희가 니한테 암 소리 안 하디?"
3자의 이름을 먼저 앞에 붙이는 건 그의 엄마의 습관이다.
시누이가 며칠 째 입원중 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백일 무렵 처음 만났던 시누이 딸, 예은이가 벌써 7살이다.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엄마 대신, 돌보미와 함께 등원한다.
그녀는 예은이가 직접 지어준 닉네임 '햇님'으로 불린다.
이제 조만간 둘째 육아를 도울 이도 자연스레 햇님으로 정해졌다.
그래서 얼마 전 부터 근무시간이 오후까지 연장되었다.
친할머니 담당이었던 하원과 학원셔틀도, 이젠 그녀가 책임지던 차였다.
그런데 며칠 전, 햇님에게 갑작스레 일이 생겼다.
어차피 최근까지 할머니의 몫이었던 일이라, 걱정할 일은 없었다.
시누이와 난 한 동네에 살지만, 어지간해선 서로 부탁하는 일은 없다.
부득이한 일이 생긴다 해도, 남을 통하지 않고 직접 연락한다.
그의 엄마가 이름을 들먹인다 한들, 딸의 의견은 아니라는 뜻이다.
'엄마도 없이..그 어린것이...쯧쯧'
서두가 길다.
누가 보면 엄마라도 잃은 줄 알겠다.
원래 맞벌이하던 집이고, 아기때 부터 할머니 손에 컸다.
아침은 다시 할머니, 오후는 연차를 낸 삼촌이 맡았다.
이전과 다를 것도 없다.
예은이는 종종 우리 집에 놀러왔다.
외숭모가 보고 싶다며 먼저 연락해오는 날이면, 약속을 잡아 학원 앞에서 데려오곤 했다.
꽃집에서 1일 클래스를 하기도 하고,
브런치카페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아주 가끔 사정이 생겨 셔틀을 부탁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손에 꼽을 만큼 가끔이다.
그리고 무조건 시누이가 내게 직접 연락했었다.
이번에도 내 손이 필요했으면 연락이 왔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엄마가 내게 딸네 사정을 대신 설명할 일이 없다.
솔직히 내가 아무리 예뻐한다 한들 혈육만 할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을 텐데, 좀체 본론이 나오질 않는다.
"세상에 애기한테 김밥을 사멕이고 자빠졌단다. 쓰것냐?"
아, 이거였구나.
본론이 나오기까지 빙빙 참 멀리도 돌았다.
하원 후 학원으로 가는 중간에 삼촌이 점심을 사 먹인다고 한다.
귀한 손녀딸의 식사가 시판 김밥인 게 마뜩잖았나 보다.
"니가 얼른 김밥 좀 싸다 줘부러라."
앞 사정을 못 들었다면 '사다 주라고' 들을 뻔했다.
그만큼 가볍게 뱉어진 말이다.
시계를 찾는 시선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10시.
취사 버튼 하나로 김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재료도 없다.
시간 내 재료 준비조차도 불가능하다.
하원 전에 준비해서 갖다 주려면, 당장 움직여야 했다.
길게 말꼬리 붙들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일단 알겠다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두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도시락.
내 짧은 경력의 주부력으로 김밥은 어림없다.
한계는 유부초밥이다.
전에 학원 셔틀을 해 본 적이 있어서 시간은 대충 안다.
어쨌든, 시간 안에 조카의 점심 도시락이 완성되었다.
얼른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면 늦지는 않겠다.
하지만 누구와도 약속된 바가 없다.
예고 없이 찾아가 도시락을 건넬 수도 없다.
사돈 총각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결국, 시누이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희 시어머니 왜 그러니?
내가 다 부끄럽고 미안해, 진짜.
그리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직접 부탁할게.
이런 식으로 엄마가 시키는 건 그냥 무시해버려.
점심은 정성들여 만들었으니
예은이에게 물어볼게.
다시 한번 내가 대신 미안해.
시누이의 메시지에서 붉어진 얼굴이 느껴졌다.
그리고 열심히 준비한 도시락이 갈 곳을 잃었다.
조카의 취향은 아니었나 보다.
시누이는 또 미안해 했다.
그렇게 그날 우리의 저녁 메뉴가 정해졌다.
유부초밥은 맛있었다.
그걸로 족했다.
다져 넣은 우엉을 오독오독 씹으며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단무지 없이 우엉만 넣고 꼬마 김밥이라도 쌀 걸 그랬나.
동시에 마른 웃음이 떠올랐다.
그냥 사 먹이는 게 영양가가 높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