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의 유통기한이 임박했다.
마치 버려진 유부초밥이 된 기분이다
최근, 생리통이 유독 심해졌다.
시작 2~3일 전부터 통증이 시작된다.
본격적으로 통증이 오면 3일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번 달엔 혈 양이 급격히 늘었다.
고통도 그에 비례하듯 온몸이 구석구석 아팠다.
달거리가 끝난 뒤에도 아랫배의 통증이 계속됐다.
다니던 병원은 멀다.
가까운 산부인과를 찾았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불편한 자세의 시간은 짧았다.
"소변검사 먼저 하고 오실게요"
모니터를 확인한 여의사가 방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심장소리가 귀에서 들렸다.
소변컵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화장실에서 붉어진 눈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로 나왔다.
진료실에 다시 불려 들어가 앉기까지, 숨을 어떻게 쉬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여의사가 모니터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아기집이 있을 법한 자리에 점 하나가 콕 찍혀있었다.
소변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큰 병원을 가보길 권유하며, 유명한 난임전문 병원의 선배교수를 추천해 주었다.
홀린 듯, 계획에 없던 난임병원에 오게 되었다.
난임센터는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묘하게 숨통이 조였다.
담당 교수는 내 상태를 보자마자 점막하근종이라고 단정했다.
크기는 작지만, 위치가 안 좋았다.
의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 지랄 맞은데 자리 잡았단다.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수술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손으로 문질러 찾아서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애매한 위치 탓에 리스크가 컸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자궁내막에 자리 잡긴 했지만, 위치가 미세하게 비껴있었다.
정확히 아기집이 생기는 자리보다는 아주 살짝 옆쪽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커지면 수정란 착상이 어려울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동그라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커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평생, 이 상태로 멈출지.
당장 한두 달 사이에 착상 불능상태가 되어버릴지.
그건 신의 영역이었다.
임신하려거든 서두르라고 했다.
저 작은 점이 덩치를 키우기 전에 아기가 먼저 자리를 선점해야 했다.
아기집과 근종.
누가 먼저 자리를 잡느냐.
시간 싸움이었다.
자연임신을 시도하면서 시험관을 같이 준비해 보는 건 어떤지도 상담했다.
하지만 난 이렇게나 불행한데, 난임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1년 이상 자연임신이 되지 않거나, 3회 연속 유산을 한 경우 난임으로 인정받는다.
난 바로 몇 달 전, 두 번째 유산을 겪었다.
의학적 난임 기준에 미달해, 시술비 지원은 받을 수 없었다.
국비 지원을 기다릴 시간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고작 0.5cm 남짓한 틈.
그건 내가 통과할 수 있는 마지막 문 같았다.
그리고 그 틈의 유효기간은, 의사조차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실 남편은 단 한순간도 아이를 원했던 적이 없었다.
서른 중반에 결혼한 나는 이미 생물학적 노산이었다.
남편은 철저하게 피임을 했다.
마음이 급한 건 나뿐이었다.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 생각했다.
합의되지 않았던 의견 충돌에 당황스러웠다.
출산에 관한 생각은 애초부터 달랐고, 그 간극은 신혼 초부터 유일한 균열이 되었다.
첫 번째 임신은 생리 주기를 속인 내 계산과 남편의 실수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 임신은 슬픔에 빠진 나를 위해, 남편이 한발 물러서 준 결과였다.
그리고 연이은 실패로 충격을 받은 건 나보다도 남편이었다.
오히려 난 슬픔과는 별개로, 큰 문제는 아니라 여겼다.
나는 3남매 중 장녀이고, 둘째와 7살 차이가 난다.
나와 둘째 동생 사이에서 엄마는 여러 번의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3남매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나는 두 번의 실패를 조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그렇게 쉬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가족 중에 임신 중 잘못된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두 번이나 하혈을 목격한 남편은, 나와는 다른 트라우마에 빠졌다.
"난 솔직히 원래부터 애 가질 생각도 없었고,
아이는 없이 살 수 있지만 너 잘못되면 난 어떡해."
그는, 마치 나를 잃을까 두려운 듯, 힘주어 말했다.
"세 번은 없어."
당시엔 우리 둘 다 회복이 필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나에겐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오랜 설득에 마지못한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고민하자고 했다.
끝내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함께 병원에 가기로 했다.
대답은 했지만 이미 마음의 방향은 확고했다.
다음날도 그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신혼 초부터 남편의 반대로 임신이 어려운 건, 모두가 알고 있던 일이다.
그럼에도 아들에겐 입도 못 뗐고, 만만한 건 역시 며느리였다.
그래도 그땐 아들 핑계라도 댈 수 있었다.
적잖은 나이에 두 번이나 같은 일을 겪고 말았다.
이젠 남편만의 문제가 아님이 드러났다.
슬슬 성화의 화살촉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엄마를 달래야 했다.
시험관 준비를 고려해 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의 엄마는, 정말 기뻐했다.
"오매! 잘 생각했다.
느그가 한다고만 하면 내가 그 돈 줘 불게"
요즘 한숨 소리만 듣느라 지쳐있었다.
몇 달 들어 처음으로 웃음소리를 들었다.
내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그날, 오랜만에 친정엄마와 통화했다.
결혼 3년째 무소식에 아마 많이 기다리셨을 거다.
그래서 더더욱, 당연히 기뻐하실 줄 알았다.
"딸. 엄마도 손주가 많이 보고 싶긴 한데,
아직 생기지도 않은 손주보단 내 딸이 더 소중해.
그거 진짜 아프고 엄청 힘들대.
엄마는 손주 없어도 되는데, 안 하면 안 돼?
박서방은 아이 갖고 싶어 하지도 않잖아."
엄마에게 괜히 이야기했나 보다.
먹은 저녁이 명치에 얹힌 듯 꽉 막혔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