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가 최고 존엄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치과의사가 주인공이어야만 했다.

2019년에 나는 만으로 31세였다.

만 31세에 새로운 분야를 시작한다는 것은 도전이었고

이미 수년간 갈고닦아온 기성작가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강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나의 강점은 명확했다.

현존하는 어떤 작가보다 치의학에 정통하다는 것.

아무리 비전문가인 작가가 사전조사를 열심히 하더라도

실제 필드에서 일하고 있던 나와 비교하면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뛰어난 고증이 곧 재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에게 몰입감을 선사하는데 이득을 볼 수 있다.


결국 강점을 살리려면 주인공은 치과의사여야만 했다.

그냥 치과의사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주요 내용이 치과 진료와 관련된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어려웠다.


치과의사가 주인공인 콘텐츠는 흔하지는 않지만

잘 찾아보면 여럿 있다.

하지만 치과진료가 주 내용인 콘텐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조사과정에서 찾아낸 콘텐츠는

일본 만화 딱 한 종류였다.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치과의사가 주인공일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진료의 극적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료가 상대적으로 극적인,

의사라는 존재가 걸림돌이 되었다.

치과환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가 되면

최소한 의사와의 협진이 필요하다.

이래서야 의사가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의사가 없는 세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짰던 설정은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들이었다.

표류한 사람들 중엔 의사가 없고 치과의사만 있었다.

이 설정으로 어느 정도 소설을 쓰다 폐기했다.

무인도에서 치과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적었다.

의사 행세를 하기엔 면허가 없고,

치과 진료를 하기엔 재료가 없었다.


이걸 깨닫기까지 한 1년 걸렸다.

나란 녀석 멍청한 녀석.

그동안 작성한 내용은 휴지통으로 작별을 고했다.



아예 새로운 세상이 필요했다.

치과의사의 치의학이 최고존엄일 수 있는 세상이 말이다.

다른 심각한 부상과 질병에서는 자유로우면서도

작은 충치는 치료 못하는 세상.

그런데 작은 충치는 결국 문제가 되는 세상.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게 말이 되는 세상.


치과 질환이 결국 문제가 되는 세상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현재의 치과질환은 생명의 문제라기보단

금전적인 문제에 가깝게 되었지만

근대에만 해도 치과질환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이 되었다.

근대 영국 통계상 사망원인 10위권 안에

치과질환이 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입에서 위로 올라가면 뇌, 아래로 내려가면 기도가 있다.

염증이 퍼질 때까지 방치되면 위험해진다.


그렇다면 마법이 있는 세상은 어떨까.

사람들이 마법으로 치료를 하는 세상 말이다.

마법의 원리는 신체의 회복력을 극대화하는 형태면 좋다.

악성종양 같은 중증질환도 신체의 면역이 해결할 수 있다.

심각한 부상도 신체의 재생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치아는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



가끔 잊을만하면 ‘치아가 새로나는 주사’에 관한

기사가 올라오는 것을 본다.

일본에서 하는 연구라고 하는데 해당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사람들이 이제는 임플란트 시대가 끝나는 건가

치과에 비용걱정이 없어지는 건가 하고 반응한다.

하지만 근시일 내에 실현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해당 연구는 태내의 배아에 하는 주사이다.

치과질환으로 치아를 상실한 성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치아를 만드는 세포, 그중 치아의 단단한 부분인

법랑질을 만드는 법랑모세포는

일반적으로 치아가 맹출 하면 사라진다.

치아를 만드는 세포가 애초에 몸에 없다는 뜻이다.


제작세포가 없는데 해당 기관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없어져버린 신체기관을 통째로 재생하거나

복제인간을 만들어

일종의 부활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정도 기술력이 있다면

충치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영생을 고민하지 않을까?



마법의 세계에서라면 해당 마법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존재하더라도 아주 귀중하고 대가가 큰 마법이라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니 사람들은 충치에 고통받으면서도

원인인 치아는 해결하지 못하고

증상만 마법으로 완화하며 살지 않겠는가.


세상 모든 마법을 부리는 대마법사는 거의 전능하지만

‘위대한’ 충치 앞에서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마법사도, 용사도, 왕도 충치 앞에서는 그냥 환자다.


그런 세상에서라면 치과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각종 기구와 재료, 그리고 치아 삭제에 필요한 동력은 마법으로 대체한다.

혹은, 마법이 아니라

아주 뛰어난 물리력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럼에도 귀금속과 고가의 재료들이 많이 들어가니
높은 지위의 귀족 위주로 치료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주인공의 영향력을 초반에 효과적으로 늘리기 위해서도

기존의 권력층인 귀족을 위주로 진행하는 게 맞다.


하지만 현대인의 의식을 가진 주인공이라면

결국 평민들에게도 치의학이 제공되길 원할 것이다.

전반부는 귀족을 직접 치료하는 내용으로

후반부는 제자들을 길러 치의학을 전파하는 내용으로 하자.



하루아침에 떠올린 생각들은 아니었다.

위의 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

쓰고 지운 수많은 글들이 있었다.

웹소설 지망생이 흔히 한다는 잘못은 다 해본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주인공을 위한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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