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좀 오래 걸릴 뿐이야
내 롤모델은 한산이가였다.
사실 웹소설이란 길을 선택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의사 출신의 웹소설 작가이지 않은가.
한산이가의 메가히트작인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가
2019년 3월 21일에 연재되었기에
내가 진로를 고민할 당시엔
지금처럼 톱작가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의 색깔대로 여러 가지 작품을 완결한,
어엿한 기성작가였고
훌륭하게 겸직을 수행하는 것만 해도 본받기에 충분했다.
연구를 위해 한산이가의 소설을 찾아봤었는데
데뷔작인 <군의관, 이계가다>를 보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나는 이것보단 잘 쓸 수 있지.”
실제로 많이들 이렇게 웹소설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렇게 웹소설을 쓰다가 한산이가님이
웹소설의 신이란 책을 위해 펀딩 한다고 하여
지원하고 책을 받아 보았다.
잘 쓰인 책이었다.
내가 그동안 겪었던 시행착오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어 공감이 많이 되었다.
진작 볼 수 있었으면 고생을 덜 했을 것 같다.
행여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집중해서 읽었다.
그러던 중에 조금 충격받은 부분이 있었다.
“한산이가 그 양반이 하루 세 개, 네 개 쓰거든? 처음부터 그랬겠냐?”
웹소설 1화 분량은 대략 5,500자 정도다.
3~4화 분량이라 하면 16,500자~22,000자.
사람인가?
당시 나는 기껏해야 하루 2000자 정도 쓰고 있었다.
10배의 차이가 난다.
처음에는 1화 분량도 힘들었다는 뒷 말은
절반 분량도 버거워하는 나에게는 기만처럼 느껴졌다.
한산이가는 처음부터 1화 분량은 힘들어도 할 만 했구나.
웹소설판에서 ‘글 뽑아내는’ 능력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소설의 인기, 독자의 템포 이런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작가 스스로 경험치를 쌓는다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한산이가는 ‘나 혼자만 레벨업’ 하고 있던 셈이다.
그렇게 레벨업해서 <군의관, 이계가다>부터 시작하여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까지 도달하였던 것이다.
나도 따라가야 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할지언정 발치까진 가고 싶었다.
글쓰기에도 근육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확 변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 다른 트레이닝을 추가해 봤다.
다른 작가의 글을 필사해 보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자
또 다른 롤모델인 퉁구스카의 작품,
<납골당의 어린 왕자>를 필사하기로 했다.
퉁구스카는 고증을 철저히 하는 작가다.
연재속도는 꾸준하지만 느린 편이었다.
그래서 내 성향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소설도 여러모로 취향저격이었다.
<납골당의 어린 왕자>는 작가로선 데뷔작 이기도하니
데뷔를 꿈꾸는 나에게 적절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혹여 불의의 사고로 필사본이 유출될 수 있으니
같은 파일에 매 화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면서 진행했다.
3~4회 분량, 2만 자를 정도를 매일 필사해 봤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필사를 하다 보니
한 문장을 옮겨 적고 또 한 문장을 곱씹으며 읽었다.
그러니 보게 되었다.
작가가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고
얼마나 많은 장치를 구상해 놨는지.
이게 데뷔작이다.
이 구성. 이 장치. 이 감정선.
사람인가? 아니. 이게 작가 인가.
말도 안 된다.
이전의 대표원장님에게 느꼈던 벽처럼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결국,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나도 도달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발치까지 가는 데에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앞으로 몇 년이 걸려야
만족할만한 소설 하나 낼 수 있을 것인가.
뱁새는 황새들을 보며 초조해졌다.
하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글쓰기였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기 위해선
더 많은 걸음을 옮겨야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