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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잔향

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24

by 시선

삶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


“내가 사는 곳은 벌써 낙엽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원장님.”


80이 훌쩍 넘은 노인 한 분이 진료실 의자에 앉으며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렇네요, 아버님. 오늘은 하늘이 참 맑습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잎이 언제 보아도 참 곱네요.”

“허허, 이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런지…”


그 짧은 한마디 속에서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 지나갔는지 모른다.


세월의 끝에서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쉬움과 상처를 두고 가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괴로움과 오해,
미움과 다툼,
말하지 못한 감사와 풀지 못한 관계들이 남는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채우기엔
삶은 너무나 짧고, 또 아름답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꽃 피우는 따뜻한 봄이 다시 온다는 건
누군가에겐 너무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간절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나는 자리를 무엇으로 남기고 있는가.


떠남은 사라짐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 남겨진 한 줄의 시처럼,
조용히 세상에 머무는 일이다.


한순간 스쳐도 꽃이 향기로 자리를 채우듯,
우리의 온기가 공기 속에 은근히 스며
누군가의 마음을 다정히 어루만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머묾’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잔향


며칠 전, 오랫동안 함께했던 환자 한 분이 찾아왔다.


“원장님, 저 내일 고향으로 이사 가요.”

“아이고, 아쉽네요. 그동안 참 오래 함께했는데요.”

“요즘은 덜 아파서 안 와도 되는데, 그래도 여기가 집 같아서 몇 번 더 왔어요.
그동안 제가 좀 투정 부린 거, 미안했어요 원장님. 우리 아저씨가 풍이 오고 나서 제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누가 좋은 말이나 표정을 짓기 쉽겠습니까.
어머님의 마음, 잘 알고 있습니다. 고향에서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그 사과와 감사의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진료실을 떠나간 뒤에도
그분의 따뜻한 온기가 한동안 머무는 듯했다.

다시 뵙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용한 아쉬움도 마음 한켠을 스쳤다.


그날 진료실 문을 닫으며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천천히 내려앉는 거리엔
낙엽 한두 장이 살포시 떨어지고,
그 위로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사람의 삶도 그렇게 스쳐가지만,
남겨지는 건 언제나 따뜻한 마음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간 비어 있는 자리에
사랑과 감사가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테지.


돈과 명예는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정한 말 한마디,
누군가의 하루를 밝힌 미소 하나는
오래도록 남아 누군가의 시간을 덮어줄 것이다.


내가 떠난 자리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아니라,
조용한 위로와 그리움으로 남기를 바란다.


오늘의 한 걸음이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오늘 숨 쉬는 이 시간이 감사로 이어지기를.


그리고 그 감사의 시간 속에서,

고통은 조용히 떠나간다.




“The best and most beautiful things in the world cannot be seen or even touched — they must be felt with the heart.”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


— Helen K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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