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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두려움을 건너온 사람

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23

by 시선

고통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


고통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먼저 사고의 유연함이 필요하다.
내가 보고 이해하고 느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도 시선을 확장하는 일.


그 과정 속에서 내면의 왜곡과 오해는 줄어들고,

관계는 회복의 길을 찾게 된다.

결국 신뢰와 안정감은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든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사고는 때로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을 부정적인 감정에만 묶어두지 않을 때,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고통(suffering)은 단순히 신경이나 조직의 손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통증은 마음과 관계, 정체성, 나아가 삶의 의미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우리 몸에 하루의 리듬(Circadian rhythm)이 있듯이, 마음에도 무의식의 흐름이 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염려가 시작되고,

그것은 곧 불안으로 이어지며 몸과 마음을 흔든다.

불안이 찾아오는 시간과 상황,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기록해 보라.

우리는 언제나 같은 패턴에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한 환자의 일기


2024년 12월

통증 느껴질 때 내 생각과 감정 :
오늘 느껴진 통증의 정도는 8/10 정도였다. 잔잔하다가도 오후에 한 차례, 퇴근 후 또 한 차례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내일은 이삿짐도 옮겨야 하고 대금도 갚아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걱정이 태산이다. 멀쩡한 몸이어도 버티기 힘든 날을, 이 통증을 안고 해내야 한다니 막막하다.

이제는 약을 먹어도 큰 효과가 없다. 병원에서는 운동과 치료를 권하지만, ‘그깟 운동으로 해결이 되겠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 통증만 몇 년째인데, 죽을 때까지 이렇게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우울과 절망이 밀려온다. 잠조차 오지 않는 밤, 고통까지 사라지지 않으니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 걸까, 억울하고 괴롭다.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염려 :

- 통증 때문에 정상적으로 살 수 없게 되었다

- 운동으로 나아질 수 있을까

- 죽을 때까지 난 아플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

- 모르겠음



2025년 6월

통증 느껴질 때 내 생각과 감정 :
오늘은 오랜만에 통증이 크게 느껴졌다. 4/10 정도. 어제 무리해서 선인장을 옮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건 내 실수였다. 그래도 증상에 매몰되지 말고, 원래 하던 운동과 자세 훈련을 이어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통증이 느껴지니 예전의 힘들었던 기억이 잠시 스쳐 갔다. ‘이거 평생 안 나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곧 깨달았다. 예전보다 확실히 덜 아프고 잠도 더 잘 잔다는 것을. 실수는 실수일 뿐, 다시 5km 달리기를 나갔다. 살이 빠지니 몸이 한결 가볍다. 약간의 불편감은 있었지만, 피곤해도 밖에 나가 달리고 나니 오히려 보람이 컸다.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염려 :

- ‘이거 평생 안 나으면 어쩌지?’

- ‘나만 다른 사람보다 일을 잘 못하나? 상사는 왜 나만 미워하는 것 같지?’


교정해 본 생각과 감정 :
걷고 달리면서 최근 나를 힘들게 했던 상사의 일을 떠올렸다. 괜히 곱씹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고, 업무량 자체가 과중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매번 비판할 거리를 찾아내는 상사의 말에 나 자신을 규정하지 말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

- 퇴근 후 걷기와 달리기

- 부정적 상상 멈추기

- 기록하기


이 환자의 기록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자신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 되었다.

절망의 순간에는 “모르겠다”는 한 줄로 끝났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는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해석을 찾아냈다.

통증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대응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흔들림 속에서 다시 서는 법


그 순간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걷거나 달리며,

혹은 글로 남기는 경험은 단순한 습관을 넘어선다.


“나는 한때 두려움에 빠졌으나 이렇게 건너왔다”는 기록은

스스로를 향한 가장 확실한 신뢰가 된다.

이 신뢰가 쌓일 때 우리는 다시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을 힘을 얻게 되고,

궁극적으로 삶의 평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결국 통증을 이겨내는 방법은 단순히 ‘잊겠다’는 결심으로 되지 않는다.

부정적인 사고가 염려로, 염려가 불안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차단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뇌는 이해나 다짐만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꾸준히 몸을 세우고, 건강한 활동을 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올바른 걸음을 이어가다 보면,

내면은 다시 나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사고의 흐름을 글로 남기는 일이 필요하다.

글은 거울이 되어 과거의 흔적을 비추고,

잘못된 길을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렇게 쌓인 작은 기록들은 결국 “나는 이 두려움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확신을 길러 준다.


고통을 마주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힘은 특별한 순간에 주어지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세우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다시 삶을 신뢰하는 반복 속에서 길러진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 너머의 평안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Out of suffering have emerged the strongest souls; the most massive characters are seared with scars.”


가장 강한 영혼은 고통에서 태어나며, 깊은 상처는 가장 큰 인격을 빚어낸다.


- Khalil Gib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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