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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나를 품는 시간>

고독의 온기

by 숨결biroso나


감나무 아래, 익지 못한 마음 하나.
떨어질 줄 몰라, 오래 흔들린다.

바람은 가볍다.
그러나 그 속에 무게가 있다.

모든 이별은 흙이 된다.
내가 남긴 그림자까지 데리고 간다.





가끔은 이유 없이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단지 바람이 스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고 싶은 순간.


그럴 때면 풍경이 나를 대신 살아주는 것 같다.


온 세상이 한결 느려지고,

바람이 먼저 말을 건넨다.



‘괜찮아, 이제 조금 내려놓아도 돼.’


그 말에 이끌리듯 나는 천천히 걷는다.

발끝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쌓여 있고,

그 소리가 마음을 비운다.



누군가의 웃음, 어제의 후회, 다 지나간 이야기들이 그 소리 속에 섞여 사라진다.

이 계절은 그렇게 우리 안의 불필요한 것들을 한 꺼풀씩 털어내며 지나간다.








가을이란 참 신비한 계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아침엔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오후엔 햇살이 벽에 부드럽게 기대어 있다.

저녁이 되면 공기 중에 이별의 냄새가 묻어난다.



가을은 변화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흔들림 자체를 품는다.

그래서인지, 우리 마음도 이 계절에 닮아간다.



길을 걷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감나무.

붉게 익은 감 몇 알이 아직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대부분의 잎이 떨어져도 그 감들은 아직 버티고 있다.


누가 봐도 위태롭지만, 그것은 어쩌면 마지막까지 버티려는 생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햇빛을 더 오래 품으려는 마음, 천천히 익어가는 마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한 그루의 감나무가 있다.

아직 다 익지 못했지만,

매일 조금씩 자신을 단단히 해가는 나무.


그 나무를 믿는 일,

그것이 곧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살다 보면 버티는 일보다 내려놓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누군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 잘못된 선택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 혹은 더는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까지.


하지만 떨어지는 잎을 보면 알게 된다.

무너짐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준비라는 것을.

가을은 우리에게 ‘비워내는 용기’를 가르쳐주는 계절이다.



오래된 공원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누군가 남겨둔 낙엽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온기가 없는데도 따스함이 전해졌다.


그건 아마 사라진 것이 남긴 흔적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웃음, 어떤 작별, 스쳐간 계절들이 겹겹이 쌓인 온도. 흔적이 전해질 때, 나는 비로소 마음속의 침묵을 듣는다.

그 침묵은 쓸쓸함이 아니라 평화에 가까웠다.



자꾸만 채우려 들었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더 잘해야 한다, 더 가져야 한다, 더 보여야 한다.

그 ‘더’라는 말이 자주 잠식했다.


그러나 지는 낙엽을 보고 있으면 알게 된다.


가득 찬 가지에는 새로운 것이 머물 수 없다는 걸.

비워야 한다는 건, 단순히 덜어내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숨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가을이 왜 좋은가요?”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을은 삶을 다독여 주는 것 같아서 좋아요."


우리를 재촉하지 않고, 묻지도 꾸짖지도 않는다.

그저 옆에 앉아, 바람으로 등을 쓸어준다.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가을이 내게 조용히 속삭여주는 것 같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

그 단순한 장면이 왜 이리 울컥해지는지 모르겠다.


그간 놓지 못했던 것들이 그 잎사귀들과 함께 흩날려간다.


바람이 불어오면 잠시 흔들리지만, 이내 자리를 잡는 나무처럼 우리의 마음도 언젠가 그렇게 단단해질 것이다.



가을은 완성보다 과정의 아름다움을 알려준다.

무르익기 위해서는 반드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비워진 마음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잎사귀는 끝이 아니라,

우리 안의 계절이 바뀌는 소리입니다.


'내려놓음’과 ‘멈춤’사이

세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단순한 진리가 오늘을 견디게 합니다.


모든 상실은

새로운 빛이 스며드는 문이 되니까요.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처럼,

소멸 속에서도 피어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다정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느리게 익어가는 감처럼, 우리도 언젠가 제 빛을 찾게 된다."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




빛이 꺼진 곳에서, 생은 다시 숨을 쉰다.
가을은 늘, 그리움의 얼굴로 돌아온다.




#내마음의풍경 #가을 #비움과멈춤 #마음의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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