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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동화<바위틈에서 시작된 작은 빛>

조개 이야기: 닫힘이 지켜낸 고요의 바다

by 숨결biroso나

조개는 그제야 알았다. 닫혀 있던 시간들이 그를 막고 있었던 게 아니라, 품고 있었다는 것을.






바다의 낮은 숨결이 바닥을 쓸고 지나가던 새벽, 조개는 동그란 방 안에서 귀를 기울였다. 겹겹의 석회질이 만든 작은 방. 밖에서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쪽에서는 파문이 한 번 흔들리고 이내 가라앉았다. 그 가라앉음이 조용해서 좋기도 했고, 너무 조용해서 답답하기도 했다.


조개는 가끔 생각했다. 저 먼 곳, 빛이 부서지는 물살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도 움직임이 될 수 있을까. 은빛 무리들이 한 몸처럼 방향을 바꿀 때, 해초는 바람처럼 흔들릴 때, 모래는 흐르는 듯이 모양을 바꿀 때, 자신도 그 사이에 몸을 눕힐 수 있을까. 닫힌 방은 따뜻했지만, 세상은 그 바깥에서만 노래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바다가 맑게 트였다. 먼 곳까지 바닥이 보였고, 파도는 너무 얌전해서 조개는 용기를 냈다. 자신을 붙들고 있던 단단한 연결을 조금씩 느슨하게 하다가, 끝내 툭 하고 끊어냈다. 껍데기는 둔탁한 소리를 남기고 바닥으로 미끄러졌고, 조개는 생애 처음 맨몸으로 바다를 맞았다.





처음엔 기쁨이었다. 물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햇빛은 살결에 따뜻했다. 조개는 몸을 살짝 틀어 보았다. 흐름이 팔처럼 조개를 안아 올렸다. 자신이 물결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환해지고, 눈앞이 더없이 넓어 보였다.


“이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겠지.”

조개는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오후가 기울자 바다는 표정을 바꾸었다. 얌전하던 물살은 길을 바꾸었고, 조류가 커다란 장난감처럼 조개를 데리고 갔다. 모래 한 알이 날카롭게 느껴졌고, 해초의 부드러운 손길은 거칠게 변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몸이 굳었다. 멈추고 싶었지만 멈추는 법을 몰랐다. 조개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열렸는데, 왜 더 깊이 휩쓸리는 걸까.”


밤이 되자 바람이 세졌다. 파도는 검은빛을 뒤집어쓰고 달려왔다. 조개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굴렀다. 바다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끝이 없다는 건 방향이 없다는 뜻이었다. 조개는 달려오는 소리보다, 달려와 지나간 뒤의 공허가 더 무서웠다. 그 공허 속에서 자신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 바위 하나가 길을 막아섰다. 바위는 아예 움직이지 않는 존재처럼 보였고, 그 움직이지 않음이 길처럼 느껴졌다. 조개는 있는 힘을 다해 바위 옆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아주 얇은 틈이 있었다. 파도는 그 틈까지는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조개는 거기에 몸을 누였다.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숨이 서서히 가지런해졌다.


틈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안정된 각도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는 조개의 얇은 껍질과 달랐다. 오래, 아주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 오래됨이 조개의 빠른 숨을 천천히 낮추었다. 바깥에서는 파도가 여전히 부서졌지만, 틈 안에서는 소리가 달라졌다. 같은 바다인데, 다른 목소리였다.




조개는 그제야 알았다. 닫혀 있던 시간들이 그를 나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품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답답하게만 느끼던 방이, 사실은 물살의 힘을 내 쪽에서 부드럽게 바꾸어주던 거름망이었음을. 나를 닫히게 한 껍데기는 세상을 막는 문이 아니라, 나를 잃지 않게 하는 문턱이라는 것을.


틈 안에서 조개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날 생긴 미세한 상처가 욱신거렸다. 조개는 그 자리를 조용히 감쌌다. 바다는 보지 못하는 속도로, 상처의 가장자리가 아주 느리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조개는 서두르지 않았다. 물결이 한 번 올 때마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물결이 한 번 갈 때마다 조금 더 매끄러워졌다. 이 느림은 바다와 싸우지 않는 방법이었고, 바닷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깨달음이었다.


새벽이 오자, 물빛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바위의 그림자도 조금씩 옅어졌다. 조개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크고 넓었다. 그러나 넓음은 더 이상 무서움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조개는 알게 되았다.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자신에게 맞는 방향으로, 자신에게 맞는 크기의 문을 열고 닫는 법을. 그리고 아주 조용히, 조개는 진주를 품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처는 고여 있지 않았고, 둥글어져 빛이 되었다.




가끔 파도가 낮게 웃을 때가 있었다. 그 웃음이 틈 사이로 들어오면, 조개는 바깥의 노래를 멀찍이서 들었다. 멀리 있어서 더 선명해지는 소리. 가까울 때는 몰랐던 리듬. 조개는 생각했다.


“나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거구나.”


그 생각을 한 뒤로, 조개의 밤은 조금 더 깊어졌다. 깊어진 밤은 무섭지 않았다. 깊어진 만큼, 아침도 깊게 와 주었으니까.


어느 날 햇빛이 바위의 각도를 타고 조개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조개는 고개를 약간 들어 빛을 받았다. 바다는 크고, 조개는 작았다. 그러나 작은 존재에게도 지켜야 할 방이 있었고, 그 방을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그 깨달음을 배운 뒤로, 조개는 더 이상 바다에게 기도를 하지 않았다. 대신 바다와 약속을 했다.


“나는 나를 지킬꺼야. 그러니 너도 너의 방식으로 나를 지나가렴.”


약속은 물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 약속은 틈에서 익어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조개는 가끔 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가끔 다시 몸을 말았다. 열고 닫는 일은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졌다. 하루에 몇 번, 파도는 밖에서 부서졌다.


어느 순간, 조개는 알았다. 자신 안쪽에서도 작은 파도가 생겨났다가 이내 잦아든다는 걸. 그 잦아듦이 조용해서 좋았다. 너무 조용해서, 이제는 더 이상 답답하지 않았다.





바다의 깊은 깨달음을 얻은 조개는 이제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껍데기의 가치를 알기에, 그는 더 단단하고 아름다운 새 경계를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평화를 누리리라.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가장 빛나는 보물을 키워낼 것이다.



모든 것을 열어젖힌 순간, 우리는 흔히 자유가 아니라 표류와 만나기도 한다.

껍데기는 바깥 세상을 거절하는 벽이 아니라, 내 안쪽을 회복시키는 품이었다.

가장 깊은 고요는, 가장 다정한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었다. 상처는 고여 있지 않았고, 천천히 둥글어져 빛이 되었다.







닫힌 방을 부끄러워하던 마음이,

닫힌 방에서만 익어 나는 빛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자신만의 작은 조개를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굳게 닫아야만 지킬 수 있는 연약한 속살과, 그 안에서만 자라나는 단단한 빛을요.





바다는 크고, 우리도 작지 않습니다. 다만 각자의 틈을 배워가는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바다가 너무 넓게 느껴지는 날엔, 우리만의 틈을 먼저 찾기로 해요.

너무 빨리 열지도, 너무 오래 닫아두지도 말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문을 여닫는거로요. 그 문턱이 오늘의 우리를 지켜줄 테니까요


"껍데기는,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가장 든든한 고독이었다.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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