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 여름, 너는 내 꿈을 물었었지
한여름 낮,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진한 커피 향과 뒤섞여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에선 매미 소리가 쏟아지고, 안 쪽에선 얼음이 부딪히는 유리잔 소리가 은근히 시원하게 들렸다.
딸은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천천히 저으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엄마.,, 물어볼 거 있어.
지금은 엄마 꿈이 뭐야?”
그 한 마디가, 내 안에서 오래 닫아 두었던 그 시절의 여름 한 장면을 깨웠다.
딸아이 여덟 살 즈음의 어느 여름날이었던 같다.
우리는 거실 한쪽에 나란히 앉아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을 읽고 있었다.
이야기 속 아빠와 아들은 늘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채 소파에 깊게 파묻혀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건 늘 엄마였다.
“왜, 맨날 엄마만 집안일해요?”
책장을 넘기던 내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딸아이 물음에 웃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이 목구멍에서 멈췄다.
딸은 그림 속 숨겨진 돼지를 찾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어린 호기심과 묵직한 의문이 섞여 있었다.
“엄마들한테도 원래 꿈은 있는 거죠?
엄마 꿈은 뭐예요?”
어린 나이인데도 그 물음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 ○○랑,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게 잘 사는 거....?”
그 대답이 입술을 떠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가느다란 금이 가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그 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딸은 이제 내 표정을 먼저 읽고,
가끔은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말을 건넨다.
그리고 오늘, 여름 오후의 카페에서 다시 묻는다.
그 웃음이, 여덟 살 즈음 여름날에 나를 보던 그 눈빛과 닮아 있었다.
나는 이번엔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나로 사는 거.”
딸은 한 모금 마시던 레모네이드를 내려놓고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창밖 햇빛이 잎사귀를 스치며 반짝였다.
나는 딸아이의 손등을 살짝 감싸 쥐었다.
유리잔 속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와 매미 울음이 겹쳐 들렸다.
우리는 말을 잇지 않은 채, 같은 속도로 음료를 마셨다.
아마 이 순간이, 훗날 딸이 마음속에서 꺼내보게 될 ‘여름’ 이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 시간은 세 겹으로 겹쳐졌다.
카페 창가에 앉은 나와 딸,
부엌에서 땀을 훔치던 젊은 날의 엄마,
그리고 그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내가 한자리에 있었다.
서로 다른 여름을 살고 있었지만,
모두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
기억 속 엄마는 여름이면 더 바빴다.
한 손으론 밥을 하고, 한 손으론 빨래를 널었다.
쨍쨍한 햇빛 아래에서도, 자기 몫의 그늘을 찾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평생 가족을 먼저 세웠다.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이름을 맨 앞에 둔 적이 있었을까?
나는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지만,
당신이 걸어온 길 위에서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그리고 내 안의 엄마에게 똑같이 말한다.
“이제는 마음속에 담아둔 꿈, 마음껏 꺼내도 괜찮아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빛을 느낀다.
엄마는 나에게, 나는 딸에게, 그리고 딸은 언젠가 또 누군가에게.
그 빛이 이어지는 한, 우린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자기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카페 창문을 통과한 여름 햇살이
테이블 위 두 손을 고요히 감쌌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빛은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찾아내는 것임을.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더욱 또렷하게 속삭인다.
“엄마, 고마워요.
당신이 한 번도 당신을 먼저 세우지 않았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나를 살게 하고 나는 또 나의 딸을 바라보는 빛이 되었어요.”
서툴러도 괜찮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을 응원하며 조금씩 꿈을 응원하고 있다.
“꿈은 여름빛처럼, 기다림 끝에 더 선명해진다.”
by 《엄마의 숨》 ⓒ biroso나.
"그때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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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숨 #모녀이야기 #돼지책 #삶과꿈
*<숨결로 쓰는 biroso나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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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 《엄마의 숨》
2) 월 《별을 지우는 아이》 당분간 휴재입니다
3) 화/ 토 《78개의 마음》
4) 수/ 금 《다시, 삶에게 말을 건넨다》
5) 수/ 토 《마음에도, 쉼표를 찍는다》
6) 목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7) 목/ 일 《가만히 피어나는 마음》
8) 금 《아무 것도 아닌 오늘은 없다》
9) 일 《말없는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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