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색깔이 사라진다면

by 아니아즈





'세상에 색깔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손에 쥐어진 ‘검정’ 크레파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나는 이 ‘검정’만으로 세상을 표현해야 했다.

그 ‘검정’은 초등학교 미술 시간 준비물인 크레파스를 챙겨오지 못해, 옆자리 짝꿍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짝꿍이 툭 내던진 단 한 개의 ‘검정’ 크레파스였다.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선생님께 들통날까, 큰 소리로 항의할 수도 없었던 탓에,

현실에 수긍하고 묘수풀이에 들어갔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검정’이 들린 손을 좌우로 마구잡이로 흔들며,

‘검정’ 세상을 그렸다.

잠시 후, 내 ‘검정’으로 가득 찬 하얀 도화지의 세상을 본 선생님이 무엇을 그리냐고 물었을 때,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우주’라고 답하였다.

우주는 검정으로 가득하지만, 무엇보다 넓은 세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난 선생님은, 내게 손바닥을 내밀게 하곤 30cm 자로 내 하얀 손바닥을 빨갛게 만들어 주며,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혼냈다.

나는 혼나는 와중에 힐끔 눈을 돌려 짝꿍을 보았다.

옆자리 짝꿍은 내 모습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그날 혼나야 했던 이유는, 세상이 너무 알록달록해서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과다할 만큼 많은 색이 범람하기에,

단 하나의 색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 색이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도리어 색이 없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색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는 색이라는 것은, 물체의 표면에 파장이 다른 빛이 반사하는 정도에 따라,

시각 계통에서 감지하는 성질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감각적 특성이다.


즉, 색이라는 것은 눈과 뇌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존재이지 절대적 존재가 아니며, 우리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색은 그 물체의 고유한 색깔이 아니다.

우리의 두 눈에는 색안경이 끼워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 물체의 고유한 색이 아니지만, 우리는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본인의 눈에 끼워져 있는 색안경 너머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색깔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이 보고 싶은 색깔들이다.

인간은 본인들이 보고 싶은 색깔들을 만든 후에, 만든 색깔에 프레임이자 틀을 부여했고, 스스로 그 안에 갇혔다.


빨강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묻는다면, 뜨거움을 떠올린다.

파랑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묻는다면, 차가움을 떠올린다.

핑크에 관하여 묻는다면,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남성적이진 않은 색상이라고도 답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색깔 그 자체에 프레임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것에 멈추지 않고, 한 대상에게 색깔이라는 프레임을 부여하기도 한다.


화장실 표식을 보면 남자에겐 파랑을, 여자에겐 빨강이 부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빨갱이’라는 말로 상대를 진보,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는 색깔이라는 프레임이자 낙인을 찍는다.

그 반대의 보수 쪽은 ‘파랑’이라는 색깔로 자신을 표출한다.

‘흑’인, ‘백’인, ‘황’인. 인종에게 색깔을 부여하고, 그 인종의 색깔에 대한 프레임을 씌운다.

동아시아 인은 이러하고, 아프리카 인은 이러하고, 백 인은 이러하다고.


우리에게 정말 눈이 필요할까. 우리의 눈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 존재할까.

색깔일까. 물체의 본질일까.

물체의 본질은 절대적이기에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색이라는 것은, 눈과 뇌의 합동 작품으로 만들어진 주관적 존재이며,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인물의 눈에 끼워진 색안경에 의해 실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지만 물체의 본질과 색깔 중, 우리는 색깔을 우선으로 본다.

그런 세상은, 과다한 색깔들과 색안경이 만들어 낸 세상이다.


우리의 눈에 끼워진 색안경에, 검정 크레파스를 새까맣게 칠해주고 싶다.

색안경이 선글라스가 된다면, 이런 세상 또한 해결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모든 이들의 눈이 단 하나의 색을 담을 수 있도록.

그렇게 세상에 색이 사라진다면, 비로소 우리는 색이 아니라,

색에 가려져 있던 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색깔이 사라진다면, ‘흑’인. ‘백’인. ‘황’인, 에서도 색깔이 사라질 것이다. 흑, 백, 황이 사라진 자리에는 ‘人’, 사람 ‘인’만이 남을 것이고, 그제야 우리는 색깔이 아닌, 사람을 눈에 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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