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과 바르셀로나, 셋
‘정말이지! 이러다가 얼어 죽겠어!!’
날씨가 잔뜩 성내던 날,
선생님과 나는 타워 브리지로 향했다.
전날에는 정오의 따스한 햇살로 잠시 몸을 데우고,
화창한 동화 속 세계를 만났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영국의 5월 날씨는 그다지 온화하지 않아.
화창한 날에도
날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서늘하게
기온을 떨어뜨렸는데.
비까지 내리다니, 설상가상.
그 사늘함은 고독의 겨울만 같아, 기분마저
우울하게 만들었다.
런던서 가장 먼저 다녀온 곳은
쇼핑하기 좋은 거리로 유명한 소호였다.
그곳은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길이 뻗어 있어,
차이나타운이나 피카딜리의 뮤지컬 극장으로
연결되었다. 다행히 머물던 호텔에서 소호까지
도보로 무리 없이 갈 수 있어, 런던에 머무는 동안
가장 자주 방문한 곳이기도 했다.
런던 둘째 날, ‘빅토리아 엠뱅크망 가든스’에서
다소 아쉬운 브런치를 즐기고,
남은 여행을 위해 날씨에 대비할
따뜻한 외투를 구매하고자 소호 거리로 나섰다.
처음 그곳에 도착하였을 땐,
선생님을 따라 명품 로드샵을 돌아다녔지만.
곧 선생님께서는 내게
“어디든 자유롭게 다녀와도 좋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무래도 관심 없는 여러 브랜드 매장을
마주하며 따분해하던 눈초리를
들켜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선생님과 서로 발걸음을 달리하며,
나는 도시 한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실은 신이 났다. 마치 자유의 몸이라도 된 듯
기분이 방방 뛰었다.
우선 외투가 하나 필요했다.
그나마 익숙한 ‘자라’ 브랜드를 발견했다.
오우~, 사악한 가격표에
덜컥 망설임의 스위치가 켜졌지만,
몸을 추위에 혹사시킬 수야 있나! 라며
열심히 외투를 찾았다.
나는 키가 좀 큰 편이라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조금 느슨하고 헐랭하게 감싸는 옷을
좋아하며,
화려한 색상은 되도록 피했다.
그러니 옷장에는 흑백으로 가득하기도 하네만.
그러므로 자라 브랜드에서 쇼핑할 때는
줄곧 남성복을 구매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물론 여성복도 두루두루 보긴 하지만,
왜 남자 옷이 더 이뻐? 라며 시샘하기도 했네.
이곳에서도, 소호의 자라 매장에서도 마찬가지.
남성복 코너에서 반짝반짝 눈에 레이더망을 켜고,
하늘색으로 빛바랜 청자켓 하나를 집었다.
사이즈는 남성용 M사이즈.
역시나 내 몸보다 훨씬 큰 사이즈가 좋다.
잠시 착용해 보니, 갑자기 힙합을 할 기세의
런더너(Londoner)가 된 기분이다.
“으힛, 마음에 들어!” 기분 좋게 계산을 마치고,
바로 걸쳐 입었다. 그리고 다시 소호 거리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전날 구매한 외투, ‘자라’ 재킷과 함께 여러 겹
옷을 잔뜩 껴입어 봄 꽃샘추위에 대비했다.
그리고 굳세게 불어오는 비바람을 뚫고
거대한 타워 브리지를
보기 위해 기꺼이 호텔을 나섰다.
“오호~ 나쁘지 않아!” 빛바랜 하늘색 재킷이
꽤 든든하게 내 체온을 지켜주었다.
우선 타워 브리지까지 가기 위해,
평소 잡지나 영화에서만 보았던 런던 지하철을 탔다.
런던에서 볼 수 있는 지하철 로고는 매우 유니크했다.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에 살짝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오래되고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체취와 낡은 쾌쾌한 냄새가
머리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윽… 상상과는 다르네. 이게 고로 현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영국에 대한
무수한 환상을 생각했다. 굉장히 따뜻하고
상냥하며 품격 있는 어느 귀부인으로부터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솝 우화라도
전해 들을 것만 같았는데...
이건 몸집이 거대한 영국 트롤들에게 둘러싸여,
차가운 회색 바람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서고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참 하고 있었을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
선생님과 나는 어두운 동굴을 헤치고
밖 세상으로 빠져나왔다. 마치 물 한 바가지의
세례를 받는 듯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나름의 낭만을 얻고자, 타워 브리지 근처
노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테이크아웃했다.
하지만… 그래, 옳지 못한 선택이었어!
이미 두텁게 껴입은 무거운 옷에, 손에 우산까지
들어야만 하고, 팔목에는 카메라와 핸드폰을 주렁
주렁 달고, 게다가 배낭까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커피는 한 모금의 낭만을
짧게 내어주고, 이내 엎질러버려 머릿속까지
끈적이고 찝찝한 상황을 만들었지.
하~아… 젠장. 뭐가 안 도와주네.
하늘을 향해 날씨를 탓하며 심통을 부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돌아갈 순 없는 노릇.
그저 비가 우적우적 내리는
회색빛 타워 브리지를 걷었고.
우산은 반쯤 걸쳐져 있어
쓰는 둥 마는 둥 했더니,
이미 쫄딱 젖어버린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외모에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이래선 부랑자처럼 보이겠어! 라며 한탄했다.
그렇게 건너,
멀리서 우울한 타워 브리지를 바라보니,
비는 이내 그쳐서 이내 해가 다시 떠올랐다.
‘이제야 나타난데도, 나는 네가 반가울 리 없어.’
건물이 내어준 틈 속에 걸터앉아,
내 눈에 전혀 화려하지 않은
굳건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차갑고 외롭고 쓸쓸하다.
고독으로부터 편지라도 받을 셈일까나.
나는 상상 속
따스한 런던의 스위치를 잠시 꺼버리고,
결코 이곳과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해 버렸다네.
이토록 한국이 그리울 줄이야.
이 먼 런던까지 와서 말이야.
정말 끔찍하지 않을 수 없었다.
by @kimbada4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