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과 바르셀로나, 다섯
여주인공 샤틴이 흑인이었어?
라며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것은 고로 나의 편견이라며,
흑진주 같은 샤틴에 집중하고자 했다.
하늘하늘한 여린 외모는 아니었지만,
매우 육감적이고 탄탄했다.
허나 노래하는 목소리는
매우 청아하여 귀가 시원하고 청량해졌다.
게다가 이 뮤지컬 공연에서 크리스티앙 역을
연기하는 배우님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나의 여신님을 대신해 주었다.
뮤지컬 『물랑루즈』속 크리스티앙은
부드럽고 감미로운 따뜻한 카페라테를 머금었을 때
기분을 가지게 해 주었다.
‘오, 나는 또다시 사랑에 빠졌어요.’
크리스티앙의 목소리에 취해
금방이라도 달려가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연기하는 몸짓 하나하나,
멜로디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가
그를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이상형으로
변신시켜 주던 순간이다.
‘내가 이런 타입을 좋아했었나?’
지난날 나의 취향을 의심했던 순간이었네.
그렇게 1막에서는 샤틴과 크리스티앙의
설레는 이야기를 즐겁게 보았고,
2막에서 처절하고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마주했을 때, 굉장히 몰입하여
주인공이 된 것마냥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났다.
마치 나는 그가 그녀에게 외면당했을 때에는
미워하고 절망에 빠진 크리스티앙이 되었고,
곧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는
슬픔으로 가득 찬 샤틴이 되었다.
결국 공연이 끝난 뒤,
어두웠던 관객석 등이 환하게 켜졌을 때
나는 눈물과 콧물 뒤범벅이 되어,
퉁퉁 부은 우동 면발처럼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옆자리 관객분과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시던 것이 부끄러워
줄행랑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좌석이 조금 떨어져 있던 선생님께서 다가오셨다.
선생님도 잠시 내 얼굴을 마주하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웃음을 터뜨리셨다.
“울었니?”라며 토닥여 주셨다.
정말이지... 나는
‘샤틴보다 이게 더 비극이야!!’
라며 부은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얼른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젠장, 부끄러워
줄행랑치고 싶었을 때 마저 그러했다.
감정을 제멋대로 부끄러움을 사고,
그 언제나 뒷수습을 하던 이성으로부터.
공연장의 건물을 빠져나오자
해가 저물었던 런던 거리가
화려한 조명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물랑루즈의 세계관이 계속 이어지는 듯했다.
게다가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다니,
늘 들고 다니던 우산을 꺼내 펼쳤다.
날이 점점 더 사나워지는 듯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나는 생각했다. 런던의 날씨는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틱한 이유는
웅장하고 멋스러운 건물들만이 아닐 거야.
이곳저곳 모든 장소에 이야기가 흐르고,
오랜 시간 쌓여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누구나 꿈꾸던 근사한 도시,
런던이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퉁퉁 부은 얼굴에 찬바람을 쐬니,
어쩐지 마음이 헛헛하여
따뜻한 라면이 그리워졌다.
호텔로 돌아가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소주를 마실 테야 라며 위로받았다.
이 낯선 타지에서 우두커니 서서,
지난날들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내 세계는 실은 너무나 작고,
작았던 웅덩이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위축되어 기가 죽고 말았지만.
또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내 것으로 키우고자 하는 마음도 자라났다.
그런 것이다. 계기란
내가 움직이고 경험하는
모든 것 속에서
우연히 한 조각을 주워 발견하는 일.
해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생긴 '계기'로
진짜의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뭐든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by @kimbada4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