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낯선 이름
자리가 나지 않아 답답한 4인실에 있어야 했던 엄마. 그런 엄마를 1인실로 옮긴다는 말에 나는 신이 났다. "엄마, 우리 1인실로 옮길 수 있대. 좋다, 엄마!" 벽만 바라보며 답답해하던 엄마는 계속 1인실이 나지 않아, 북적이는 4인실 입구 쪽 침대에 계셔야 했다. 사람들의 오가는 소음 속에서, 엄마는 커튼을 친 채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갇혀 계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이런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다니, 너무 속상한 일이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1인실이 났다. 한순간이라도 답답한 곳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엄마를 먼저 옮겼다. 짐은 천천히 옮기기로 했다. 넓고 쾌적한 병실, 햇살이 잘 드는 큰 창이 특히 좋았다.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시는 엄마가 하늘도 보고, 운이 좋은 날이면 새들이 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답답했던 4인실을 벗어난 나는 "좋다, 좋다"를 연신 되뇌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동생이 나를 조용히 밖으로 불렀다. "여기 임종실이야. 의사가 오늘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어. 누나한테는 너무 울까 봐 말을 못했어. 이제 말해주는 거야. 여기서 3일이 고비래."
분명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때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임종'이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3일이라고?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지금부터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엄마에게 좋은 이야기 많이 들려줘야지. 고마웠던 것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말해줘야지.'
턱에 힘이 빠져 벌어진 입 때문에 혀가 말라 갔다. 그래서 얼굴 주변으로 가습기를 최고 수준으로 틀어두었다. 침대 앞으로 넓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고, TV에서나 보던 맥박 측정기가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산소 포화도를 유지하기 위해 산소마스크도 준비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답답하셨는지 자꾸 마스크를 빼려 하셨다. 한밤중에 잠깐 졸기라도 하면, 삐삐삐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이렇게 산소마스크 안 하면 언니랑 현제랑 못 보고 죽어. 엄마, 잘 쓰고 있어야 내일 언니랑 현제도 볼 수 있어. 우리 잘 기다리자, 알았지?" 그러자 엄마는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제 거의 모든 감각이 둔해져 아픔조차 느끼기 힘든 상태였다. 그 작은 고개 짓 하나가, 얼마나 놀라웠던지. 입원 전, 집에서 쓰러지셨을 때 새끼들도 못 보고 죽을 뻔했다며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의 인생 마지막 자락에서 가장 생각나는 존재, 바로 자식들이었다.
남편은 엄마 병문안을 자주 오지 않았다. 엄마 입장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사위를 굳이 보고 싶어 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니, 온전치 않은 정신에 사위라는 존재는 없을지도 모른다며. 대신 내가 병원에 더 자주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딸들을 픽업해주고, 식사를 챙겨주며 나를 뒷바라지해 주었다.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엄마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었을 것이다.
3일 후면 영원히 끝일지도 모를 엄마의 얼굴을, 나는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영 다시는 만지지 못할지도 모를 엄마의 얼굴을 만지고 또 만졌다. "엄마 덕분에 정아가 이렇게 잘 컸어. 정말 고마워, 엄마." 대답은 없었지만, 엄마의 따뜻한 손길과 미약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숨결 속에서 엄마를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래도 잘 살았다. 한평생 원 없이 살았다.' 그렇게 느끼시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매일 사랑을, 감사를 말했다. 이 모든 말이 엄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직은 따뜻한 엄마의 체온이 감사했다.
'우리 꼭 다시 만나자.' 나는 마지막까지 속삭였다. 그렇게 우리 둘만의 임종실에서의 밤은,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