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언니 안녕하세요.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어디에서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커피를 사들고 회사 근처 주민센터에 있는 도서관에 왔어요.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린이실에 들어가 방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는데 바닥이 따끈해서 시골 할머니집 아랫목에 앉은 느낌이에요.
코로나 이후로 못 뵌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나갔네요. 그전에는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제가 근무하던 사무실 앞에 들러서 언니가 기웃거리면 직원들이 친구 왔다고 알려주곤 했지요. 사탕이나 초콜릿, 바나나 같은 간식거리를 손에 쥐어주시곤 하셨는데 마침 배가 출출하던 때라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세요? 수어 수업을 같이 들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자리가 떨어져 있어서 얼굴만 익혀둔 채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제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죠. 늘 열심히 배우는 모습이 예뻤는데 저는 누가 눈에 들어오면 궁금한 걸 풀어야 하는 성격이에요.
수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죠. 농인과 청인으로요. 언니나 저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지만 청력이 좋지 않으니 농인이라고 봐야겠지요.
저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언니는 청인인 줄 알았어요. 말씀을 잘하셔서 어쩌다 못 듣게 되었는지 궁금했어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못 듣게 되었다고 하셨을 때 깜짝 놀랐어요. 하루아침에 소리가 안 들리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저는 어릴 때 물놀이를 다녀온 후 귓병을 자주 앓았는데 치료를 제대로 못해서 난청이 진행되었어요. 아주 천천히 진행되어서 초중고, 대학을 큰 불편 없이 다녔어요. 잔존 청력으로 전화통화도 할 수 있는 정도라 다른 농인들은 저를 보면 부러워하더라고요.
처음 뵈었을 때 언니는 너무 순수해서 아기 같은 느낌이었어요. 늘 밝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천성이 착한가 보다 생각했어요. 언니는 막내로 위로 언니들이 있지만 저는 여동생 둘이 있어서 귀여운 선재언니에게 언니 행세를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수어를 배울 때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이 배워가겠다는 마음으로 선생님들을 종종거리며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했는데 그렇게 배운 걸 언니에게 알려드리고 싶어서 안달을 내기도 했어요. 청각장애인 수어통역사 시험 준비를 같이 하면서도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냐고 채근도 하고 예상문제를 만들어 같이 연습해 보자며 언니를 많이 괴롭혔지요. 그런 저를 불편해하면서도 많이 호응을 해주셔서 같이 시험에 합격했잖아요. 발표날은 정말 기뻤죠. 그렇게 어렵게 공부를 했는데 수어를 사용하지 않으셔서 많이 잊어버리셨다니 정말 안타깝네요.
혹시 그날 기억하세요? 선생님이 수업 중에 우리 둘만 콕 찍어서 질문을 하신 날이요.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을 수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우리 둘에게만 그 뜻을 아냐고 물었잖아요.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둘만 청각장애인이어서 선생님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어요.
저는 기분이 상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선생님을 쫓아 나갔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청인 중에 농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거라고 속단하고 또 수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청인들이 쓰는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요.
선생님께 ‘아까 선재님과 저에게 비 온 뒤에 굳는 땅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이 속담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저희만 콕 집어 질문하셔서 좀 불쾌했어요. 못 듣는다고 다 무식한 건 아닙니다’라고 하니 선생님은 당황하시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셨어요. 씁쓸했지만 마음을 누그러뜨렸지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언니에게 전해드리니 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지요. 남에게 싫은 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 분이지만 속에 담아둔 말은 많으셨잖아요. 돌이켜보면 제가 마치 언니의 대변인인양 이런저런 장애물을 치우는 역할을 가끔 했던 것 같아요.
자식들은 서울로 보내고 매일 남편분이 출근한 후엔 어떻게 지내시나요? 가족들과도 대화가 어렵고 친구들도 대화가 안 돼서 친구는 그만 만나야겠다고 하셨는데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얼마 전 갑자기 언니한테 전화가 왔을 때 업무 중이라 받지 못했어요. 집에 가서 다시 걸어봐야지 했는데 솔직히 언니와 전화통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이 됐어요. 우린 영상통화만 했지 음성만으로 하는 통화는 한 적이 없었죠. 언니가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봐 전화를 못했네요.
언제 서울에 한 번 오세요. 보고 싶어요. 제가 맛있는 밥을 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