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Estampes의 Pagodes로 만나보는 동양의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드뷔시는 인도네시아 가믈란 합주의 이국적인 울림 앞에서 충격을 받습니다. 서양 화성과는 전혀 다른 금속성의 잔향, 자유로운 리듬, 겹겹이 쌓이는 울림. 그로부터 몇 해 뒤, 그는 직접 가본 적 없는 ‘동양의 탑’을 상상 속에서 그려냅니다. 판화처럼 찍어낸 듯한 선율과 음향,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할 Estampes (에스탕프)의 1번째 곡, Pagodes(파고드)입니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용어는 원래 미술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음악과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이 사실적인 묘사를 피하고, 빛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해 화면에 재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문학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상징주의(Symbolism)’로 불렸으며, 랭보와 말라르메 같은 시인들이 대표적이었지요. 음악사에서도 인상주의는 낭만주의에서 현대 음악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중요한 다리를 놓으며, 새로운 감각과 표현 방식을 열어 주었습니다.
드뷔시는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생제르맹-앙-레에서 가난한 상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음악과는 인연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상인이나 농민이었습니다.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그는 주로 고모와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바로 이 고모가 드뷔시의 음악적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피아노를 배우게 했습니다. 놀랍게도 불과 1년 만에 그는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드뷔시의 음악 세계를 바꾼 전환점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가믈란 합주를 접하고 깊은 매혹을 느낍니다. 서양 음악의 화성과는 전혀 다른 금속성 타악기의 울림, 자유롭고도 겹겹이 쌓이는 리듬, 낯선 선율의 흐름은 그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경험은 드뷔시로 하여금 이국적 정서와 동양적 색채를 탐구하게 만들었고, 이후 <파고드>를 비롯해 ‘동양풍’의 음악을 다수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음악에 깊게 매료됩니다. 가믈란은 자바와 발리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대규모 기악 합주 형태의 전통 음악으로, 금속 타악기를 중심으로 공, 차임, 북, 마림바와 같은 악기들이 어우러지는 일종의 오케스트라입니다. ‘가믈란’이라는 이름 역시 인도네시아어 ‘가멜(gamel, 내려치다·두드리다)’에서 비롯되었으며, ‘an’이 붙어 ‘집합, 합주’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드뷔시는 이 음악에서 형식의 자유로움, 타악기의 다채로운 효과, 유럽과는 전혀 다른 선율과 울림을 경험했고, 깊은 충격과 매혹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이 만남은 그가 <파고드>와 같은 동양적 색채의 작품을 남기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드뷔시는 평생 피아노 작품을 유난히 많이 남긴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만국박람회에서 접한 가믈란의 타악기적 울림과 자유로운 리듬을, 서양 악기인 피아노를 통해 재현해내려 했습니다. 타악기이자 동시에 건반악기인 피아노를 매개로, 동양의 오케스트라라 할 수 있는 가믈란의 음향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파고드>입니다.
드뷔시는 그 당시 파리에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고 합니다. 말라르메와 보들레흐의 시는 드뷔시의 가곡에도 자주 사용이 되었고 그는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살롱에 자주 초대되어 화요일 오후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상징주의 시인들과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아래(인용)
이혜진,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에서도 <그라나다의 저녁(La Soirée dans Grenade)>을 중심으로 드뷔시가 보여준 이국주의적 표현이 집중적으로 분석된 바 있습니다.
파리 전위 예술가들과의 교류이다. 드뷔시에게 독창적 작곡의 영감을 제공했던 것은 바로 인상주의 회화와 상징주의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음악외적 영역들은 말라르메(S.Mallarme) 집에서 화요일 오후마다 있었던 모임을 통한 관계에서 기인했다. 특히 이 가운데 베를레인(P.Verlaine), 말라르메, 보들레르(C.Baudelaire) 등 상징주의의 뛰어난 시인들의 텍스트를 사용하여 1890년대에 많은 가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또 말라르메가 쓴 시를 배경으로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Prelude à L'après-midi d'un Faune>(1894)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드뷔시의 인상주의적 음악양식을 수립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곡이다.
위처럼 드뷔시의 음악은 단지 소리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당대 화가와 시인들이 탐구한 미학적 감수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에스탕프(Estampes)는 드뷔시가 인상주의적 색채와 이국적 정서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피아노 모음곡입니다. 세 곡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제목은 ‘판화’를 뜻하는데, 이는 당시 파리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본식 목판화에서 직접 따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드뷔시가 동시대 화가들과 얼마나 깊은 교류를 나누었는지를 엿볼 수 있지요.
그중 첫 곡 파고드(Pagodes)는 ‘탑들’이라는 뜻을 지니며, 드뷔시가 실제로 본 적 없는 동양의 탑을 오직 상상과 인상에 의존해 그려낸 작품입니다. 반복되는 리듬과 겹겹이 쌓이는 화성 속에서 탑이 지닌 안정감과 단아한 아름다움이 드뷔시 특유의 색채로 표현됩니다. 마치 한 장의 판화처럼, 짧은 순간의 인상을 소리로 찍어낸 음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