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세계를 내려놓는 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나는 여전히 견고한 알 속에 갇혀 있었다.
나의 세계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지휘자는 포디엄 위에서 단정해야 하고,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몸짓은 늘 미학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음악을 위한 미학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얄팍한 방어 기제였다. 어떻게 보일지에 매몰된 순간, 음악은 나의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음악을 표현할 의지를 보여라, 몸을 더 사용해라"는 선생님의 일갈에, 나름 몸을 던졌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고도 경이롭기 까지 했다. 거울 속의 나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승모근에는 과도한 힘이 들어갔고, 팔과 상체는 마치 서로 다른 의지를 가진 것처럼 따로 놀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던 건 내 표정이었다. 갈 곳 잃은 눈동자와 확신없는 몸짓은 덜떨어져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제 몸보다 훨씬 큰 어른의 옷을 걸치고 엉거주춤 서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막춤'처럼 보였을지 모를 그 기괴한 몰입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생경한 음악의 순간을 목도했다. 나를 비운 자리에 비로소 음악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알을 깨는 것은 한 번의 충격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관성'이라는 지독한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몸을 웅크리며 상처받지 않으려는 나의 작은 자아는 다시 우아한 껍데기 속으로 숨으라고 속삭인다.
"나는 과연 이 관성을 이겨내고 나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까?" 레슨 중에도 수십 번씩 튀어나오는 이 질문은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느껴지는 이 '지독히 불쾌한 감각'이야말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근육이 커지기 위해 근조직을 미세하게 찢어 통증을 유발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처럼 말이다.
성장은 우아하게 계단을 오르는 일이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짜 성장은 익숙했던 껍질에 균열을 일으키며, 때론 그 조각들이 살을 파고드는 불쾌한 고통을 수반한다. 나의 낡은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태동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진동이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어른의 옷을 입은 아이가 어색한 건 아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 옷을 감당할 만큼 몸이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어른처럼 걸으려 애쓰기보다, 지금은 이 헐렁한 옷 안에서 마음껏 넘어지고 부딪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내가 마주한 이 볼품없고 추한 모습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지독한 성장통이자 필연적인 진동이다. 나는 오늘, 기꺼이 추해짐으로써 내 몸이 그 지휘자 라는 옷에 어울리는 날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