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가 가까워질수록 내 삶의 중심축은 점점 내 쪽으로 기울었다. 오랜 시간 가족을 위한 시간, 일터에서의 책임, 사회적 역할에 쏟아부은 에너지를 이제는 나 자신에게 돌리고 싶었다. 집 안이 조용한 것은 좋았고,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들어 있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혼자라는 삶에는 분명한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밤이 길어질수록 문득 허전함이 들기도 했다. 건강검진 결과를 혼자 들고 나올 때, 늦은 밤 발길을 끌어줄 누군가가 없을 때, ‘무사히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타인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큰 공백이었다. 결혼이 답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음’이 여전히 삶의 중요한 축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60대를 넘긴 나이에 ‘재혼’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법적으로 얽히는 문제, 자녀들과의 관계, 재산 문제까지 고려하면 쉽게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또다시 한 사람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도 크다. 사랑의 형태가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 있다. 청춘의 사랑이 뜨거운 불꽃이었다면, 황혼의 사랑은 따뜻한 난로 같아야 한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보다, 오랫동안 곁을 따뜻하게 해주는 존재.
그래서 떠오른 것이 ‘계약 동거’라는 방식이었다. 법적 혼인이 아닌, 생활과 감정의 일정 부분을 공유하되, 각자의 삶도 존중하는 형태.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되, 자산은 따로 관리하고, 각자의 사생활은 침해하지 않는 것. 혼자보다는 낫고, 결혼보다는 가벼운, 그러나 그 안에 진심과 신뢰가 깃든 관계.
이미 프랑스의 PACS, 독일과 일본의 사실혼 제도, 미국의 ‘파트너십 계약’은 이런 흐름을 제도화하고 있다. 한국 사회도 이제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부부’, ‘동거하는 시니어 커플’이라는 표현이 더는 이상하지 않다. 물론 여전히 주변의 시선은 조심스럽고, 가족의 반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삶의 주도권을 누구에게 두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긴 수명을 축복이라 부르기 위해서는, 그 시간 동안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꼭 ‘배우자’일 필요는 없다. 나를 이해해주고, 존중해주며, 필요할 때 곁에 있어줄 사람. 계약이라는 형식을 빌렸을 뿐, 본질은 동행이다.
황혼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삶이 단조로워지는 시기가 아니라, 관계의 형태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다. 계약 동거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노년을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한 전략이다.
나는 지금, 혼자인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더 나아가 ‘함께 있음’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싶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작은 약속 한 장, 이해와 배려를 담은 계약서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