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인간관계란 참 미묘하다.
좋아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사소한 오해가 쌓여 틀어지기 쉽다.
하물며 황혼의 동거는 더욱 그렇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각자의 짐을 안고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계약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적인 구속력이 문제가 아니다.
서로의 기대를 조율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최소한의 장치.
노후 동반자 계약서는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가장 먼저 정할 것은 각자의 독립성이다.
경제적 자립, 생활 방식, 인간관계에 대한 간섭 금지.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동거는 금세 피로해진다.
경제적 지원은 원칙적으로 각자 부담.
가사노동은 공평하게 분담 또는 외부 서비스 이용.
개인 생활과 취미에 대한 자유 보장.
이런 기본 원칙이 명확해야, 작은 일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노년의 동반자에게 건강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화두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서로를 돌보되, 강요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계약서에는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정기 건강검진을 독려하되, 강제하지 않는다.
응급 상황 발생 시 동행과 연락망 지원.
만성질환 관리에 있어 생활습관 개선을 함께 협의하되, 자율성을 존중한다.
즉, 서로의 건강을 챙기지만 간섭하거나 책임지지는 않는다.
건강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단, 응급 상황에서는 예외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이 선을 명확히 해두는 것이 좋다.
노년 동거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 돌봄이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어느 순간 일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애매하게 두면 갈등과 부담이 쌓인다.
그래서 나는 돌봄 항목을 반드시 계약서에 넣는다.
경증의 일상적 돌봄(병원 동행, 약속된 일시적 도움)은 상호 협의 후 지원.
중증 질환 발생 시 장기적 돌봄 책임은 계약 갱신 시 재협의.
돌봄의 범위와 기간, 외부 요양 서비스 이용 여부는 사전 합의.
한쪽의 부담이 과도해질 경우 계약 해지 또는 조정 가능.
중요한 건, 사랑이니까 당연하다는 환상을 배제하는 것이다.
책임과 감정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
그것이 서로를 더 오래 존중하는 길이다.
돌봄과 건강 문제는 가족과도 얽히기 쉽다.
자녀나 친족이 개입하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한다.
계약서에는 이런 조항을 포함할 수 있다.
가족과의 재산, 상속 문제는 동거인과 무관.
가족 간 의료, 법적 대리 권한은 사전에 명확히 규정
동거인의 가족 문제에 대한 개입 자제.
응급 상황 시 연락 체계는 상호 협의 후 확정.
서로의 가족사까지 얽히지 않는 것이 황혼 동거의 지혜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감정의 선을 잘 그어두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나는 대답한다.
그래야 오래 갑니다.
계약서가 마음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약서가 있어야 마음을 더 지킬 수 있다.
황혼의 계약 동거는 누군가를 얽어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를 존중하며, 불필요한 상처를 예방하는 지혜다.
그 작은 합의 한 장이, 오히려 우리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