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두고 나눈 나와의 대화
이제 은퇴까지 15개월.
엑셀 파일은 더 이상 손댈 게 없다.
연금 수령 시점, 자산 운용 계획, 롤오버 전략, 여행지별 1-3달 살기 일정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불편하다.
불안한 건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기대에 들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문장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선택, 62세 조기은퇴, 후회하지 않을까?”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을 시작하려는 지금,
그 질문은 자주 나를 찾아온다.
아마도 대부분의 은퇴자들이 이 시기를 통과하며 한 번쯤 마주했을 감정일 것이다.
그걸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두려움과 마주 앉아, 담담하게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왜 무서운 거지?”
“모든 게 불확실하니까요.”
두려움은 대답했다.
“그동안은 매달 고정된 급여가 있었잖아요.
직장이 있어야만 세상이 내게 의미를 준다고 느껴졌잖아요.
이제는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해요.
정해진 길이 없으니, 내가 방향을 정해야 하잖아요.
그게 쉽지 않잖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직장을 나올 때의 허전함, 월요일 아침에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속의 낯섦.
누구도 시키지 않지만 매일 두 시간씩 운동하고,
골프장에서 공을 치며 혼잣말을 반복하게 되는 일상.
자유는, 생각보다 적막하다.
“그럼, 다시 일할까?”
내가 물었다.
두려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이미 결정했어요.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삶 대신,
시간 자체를 주인으로 삼기로.”
그 말에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래, 이건 도피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내가 만든 수십 장의 시나리오,
나의 가치관과 꿈에 맞춰 계산한 인생의 다음 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이유는?”
두려움은 웃으며 말했다.
“살아 있는 증거니까요.”
“당신이 여전히 배우고, 변화하고, 적응하고 싶은 사람이란 뜻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두려움이 있다는 건, 내가 이 삶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두려움은, 실패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제대로 살고 싶다는 간절함에서 오는 감정이다.
다시, 나에게 묻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후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까지 잘 살아왔듯, 은퇴 이후의 삶도 그렇게 살아갈 거야.
천천히, 깊이, 그리고 의미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