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밥이나 사. 그 한마디에 심장이 뛰었다

by 달이음

수의학 개론 수업 발표 날.

프로젝터가 켜지고, 강의실의 조명이 희미해졌다.
앞쪽에 위치한 슬라이드가 천천히 스크린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다음은 서이람, 이서준 조 발표하세요"


교수님의 목소리가 울리자 이람은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들려온 건,


“괜찮아. 잘 할꺼야 ”

현우의 낮고 짧은 한마디였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이람은 조심스레 강단 앞으로 나아갔다.

현우는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따라섰다.


“저희 조는 수의학과를 선택한 이유. 그리고 내가 꿈꾸는 수의사의 모습.”
을 발표하겠습니다.


처음 시작은 괜찮았다.
그러나 두 번째 슬라이드로 넘어가는 순간,

손에서 미끄러진 리모컨이 바닥에 ‘찰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짧은 정적.

주변의 웅성거림.

이람은 머리 속이 새하얘졌다.


다시 리모콘을 바닥에서 집어 올렸지만,

실수로 잘못 눌려졌는지 화면 몇 장이 앞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이람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마이크도 담아내지 못했다.


그 순간,

“말씀드린 대로,

저희 조는 수의학과를 선택한 이유. 그리고 내가 꿈꾸는 수의사의 모습을 발표하겠습니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
현우가 앞으로 나섰다.


리모컨을 조심스럽게 받아 든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라이드를 되돌렸다.


“이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학대를 받고 구조를 당하기 전의 강아지의 모습과 구조 후,

입양을 간 강아지의 표정이 큰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람은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그의 옆모습만 바라봤다.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마음.
지금 이 순간, 현우는 그녀를 단단히 지켜주고 있었다.


드디어 발표가 끝났다.

교수님의 짧은 피드백, 그리고 박수.

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현우가 말했다.

“고생했어. 잘했어.”


“…나, 실수했는데…”


“그런 건 아무도 기억 못 해.
넌 준비도 잘했고,
그냥… 조금 긴장했던 것뿐이야.”


현우의 위로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사실, 발표를 하겠다고 먼저 나선 건 이람이었다.
현우가 서준이라는 이름으로 도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혹여라도 그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F학점은 물론,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대 공포증이 있었지만,
발표 당일엔 청심환까지 챙겨 먹고
자신이 직접 마이크 앞에 서기로 결심했다.


‘혹시나 들켜서 현우가 잘못되면 안돼.’

그 단 하나의 마음으로.


하지만 결국 실수를 해버렸고,
그 실수가 혹시나 현우에게 불이익으로 돌아갈까
발표가 끝난 뒤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자꾸만 좀 전 일이 떠올라 시무룩 해지고,
자신을 향한 자책이 커져갔던 그 순간,


현우의 짧지만 단단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고생했어. 잘했어.”

진심이 담긴 그 한마디에,

이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뭉근하게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이람의 마음은 조금 더,
아니,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현우를 향해 커져버렸다.




이제 제법 가까워진 이람과 현우는 전공 강의실에서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사소한 대화를 하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아이들의 수근거림과 보미의 시선이 아직도 불편했지만,

현우를 향한 마음이 그 불편함을 누르고 더 크게 부풀어 올라서,

이제 될 때로 되라는 식으로 현우와 시선을 주고받는 이람이었다.


전공수업이 끝나고 현우가 이람에게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제 실수한 거…그거 계속 신경 쓰여?”

현우는 이람에게 말 붙일 구실로 어제 발표 얘기를 슬쩍 꺼냈다.


“…응? 응.. 혹시나 나 대신 너가 발표해서 교수님이 너 도강 한거 눈치채실까봐..”


“괜찮을꺼야..”

“근데 계속 걱정되면,”


현우가 살짝 장난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주말에 밥이나 사.”


“…응?”


“토요일. 너 약속 있어?

없으면 점심 괜찮지?”


이람의 눈이 커졌다.

‘밥이나 사’라는 그 말 한마디가
왜 이토록 가슴을 뛰게 하는 걸까.


“…어어.. 약속 없어, 밥 살게…”

이람은 마구마구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그리고 주말이 오기까지의 며칠 동안,
이람의 머릿속은 현우로 가득차 버렸다.





필름의 끝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다. [필.끝.너]

- 달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