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 시작한 가장 처음의 끝
단상 :
짧은 생각이나 상다리가 짧고 평면이 조그마한 소반의 단상이라 생각 하시겠지만.
본뜻은 번개처럼 뇌리에 박히는 상 이라 하야 단상이라 불리움.(말의 거짓말이 보태어지지 않기에, 직관, 즉설로도 불리우는 가장 진실된 생각과 사유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짐을 뜻함)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말이 시작되다
우리는 말하지 못했던 말로 인해 살아왔다.
어쩌면,
말보다 앞선 감정이 있었고
말보다 뒤늦은 사과가 있었으며
말 대신 침묵하거나
말이 과잉되어 되레 거짓이 된 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상은 그런 말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말의 잔해와 언저리,
패잔병처럼 떠도는 단어들,
그 아무것도 아닌 말들을 모아
우리는 ‘진심’이라 불렀다.
왜 저럴까에 호응 하거나, 부정한적 있는가...
그 선택의 시간이 길던가???
길다면 길수록 말의 거짓들이 보태진 것이겠고, 짧다면 그간의 신념의 축적이 시간을 단축한 셈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정리했나?
1화 ‘꼴값’
값을 칠 수 없는 진심을 풍자하며
단어는 우리 안의 천덕꾸러기를 껴안았다.
2화 ‘지랄’
삭제된 언어들의 울분이
말보다 앞선 감정의 발작처럼 드러났다.
3화 ‘관종’
관심을 먹고 자라는 시대의 비명을
관점으로 돌려놓았다.
4화 ‘헛소리’
미끄러진 감정의 잔해,
그러나 가장 진실에 가까운 목소리.
5화 ‘고인물’ –
정체와 축적,
그 경계에서 우리는 썩지 않는 기억이 되려 했다.
(우리가 공룡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생각해보면 쉽게 안다.)
그래서 남는 말은, 이것이다
"말이란 늘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르다."
"진심이란 말에 다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말은, 종종 패잔병처럼 남는다."
그래서 그 말들을 다시 주웠다.
버려졌지만 버릴 수 없던 단어들,
한때 입에 담기 어려웠던
지극히 우리다운 말들을.
그 말들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비고란에 붙이는 마지막 포스트잇
“나는 늘 말이 끝난 자리에 머물렀다.
거기서야 비로소 진짜 말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패잔병 같은 말들, 그것들이 진심이었다. 누구도 꾸며주지 않았기에.”
이제 끝맺음이 남았지요.
하지만
끝이란, 말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음 말이 자라기 위해 잠시 뿌리를 내리는 자리일 뿐이다.
축복받은 언어의 승리자인 사랑, 긍휼, 자비, 자애, 박애, 애정, 공감, 감사, 복, 감탄, 감복, 우정들이 있기전의 그 칠흙 같은 언어를 먼저 만나려 했다.
(늘 만나도 씨 발은 어색하고 입에 촥 붙는다.)
감정을 아무리 꽃으로 포장해야 그게 감싸질까. ?
똥을 숨기는 말이 가장 더럽다.
하지만 모든 존재의 어미들이 애기집부터, 자기 새끼의 대변부터 핥아 먹는 이유가, 태어난 환경에서의 모든 변수와 위험요소를 숨키기 위함이라는걸, 다들 알지 않는가..
가장 더럽고 위태한곳에 있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하찮은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