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다고 잊어지나
제목 : 아영이 이불
아영이와는 꽤 오래된 사이다. 아마 아영이의 나이만큼, 알고 지낸 사이일 것이다. 나는 아영이의 이불이다. 아영이는 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 물건은 오래 쓰면 길들고, 길든 물건은 사람의 형태를 기억하곤 한다. 나는 아영이의 몸 형태를 정확히 기억하고 아영이는 부드러워진 내 표면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연인으로 치자면, 우린 제법 준수한 관계를 유지한다.
아영이는 24살이 되자 독립을 선언한다. 이것저것 자신의 물건을 챙기는 와중 나, 길든 이불은 단연 1순위다. 나와 인형 몇 개, 그리고 진짜 필요한 물건(노트북, 책, 이것저것)을 박스에 집어넣고 아영이는 상경한다. 부모님 집의 반의반의 반만 한 공간, 아영이의 퀸사이즈 침대가 들어가지 않는다. 아영이는 이케아로 출동해 슈퍼 싱글 침대를 주문하고 당분간 바닥에서 잠을 잔다.
그러고 1년 뒤, 아영이는 작은 털 뭉치 하나를 데려온다. 그 회색 털 뭉치는 아장아장 걸어 다닌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더니 짜구낸 배를 드러내며 발라당 드러누운다. 아영이는 입이 찢어지라 웃는다. 아영이는 털 뭉치를 말랑이라고 부른다. 말랑이는 아영이네의 새 식구가 된다. 아영이는 틈만 나면 털 뭉치를 끌어안고 배 냄새를 맡거나 볼 냄새를 킁킁거린다. 분유 냄새가 난다고 말하며 뽀뽀한다. 작은 녀석은 확실히 귀여운 편에 속하지만, 나는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꾸 내 몸에 회색 털을 날린다. 뾰족한 털이 촘촘하게 박혀 엉망이 된 나, 아영이는 나를 제법 아꼈는데 최근엔 돌돌이 샤워도 해주지 않는다. 말랑이 녀석에게 정신이 팔린다. 솔직히 말해서, 질투한다.
영원히 말랑이가 미울 줄 알았다. 그래도 정이란 게 무섭긴 하다. 3년 정도 지나니 말랑이는 털 뭉치에서 팔다리가 죽죽 한 목각인형이 된다. 말랑이 녀석의 최애 장소는 잘 정리된 내 머리 꼭대기다. 거기에 식빵을 굽듯 팔다리를 숨겨 고롱고롱 소리를 낸다. 처음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어디 버릇없이 머리 꼭대기에서 퍼질러 잠을 자나 싶었다. 하지만 아영이가 말하길, 말랑이한테서 분유 냄새가 난댔나. 말랑이가 지나간 자리엔 비릿하지만, 고소한 땅콩 냄새가 난다. 아영이는 분유라고 했지만, 나는 잘 볶은 땅콩 냄새 같다고 생각한다. 아영이도 나도 말랑이에게 길들어 가고 있다. 고소한 땅콩 냄새, 부드러운 분유 냄새가 12평짜리 아영이 원룸에 솔솔 퍼진다. 여유롭게 꼬리를 살랑거리는 말랑이는 나를 질근질근 밟으며 빙빙 돈다. 공처럼 말려 도로롱 꿈나라로 떠난다.
아영이가 출근한 날, 말랑이는 바닥에 여덟 번 구토한다. 마지막엔 초록색 액체를 토하더니 힘이 없는 듯 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말랑이가 걱정된다. 빨리 아영이가 왔으면 좋겠지만 아영이는 올 시간은 아직 멀었다. 말랑이는 마지막으로 헛구역질하더니 웅크린 자세로 꼼짝을 안 한다. 옅고 짧게 숨을 쉰다. 거긴 추울 텐데, 차라리 여기로 올라왔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다음 날, 늦은 저녁, 아영이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돌아온다. 아영이는 펑펑 울다가 진정하고 숨을 고르더니, 다시 펑펑 울다가, 말랑이가 두고 간 말랑이 장난감을 힘없이 바라본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른 아침, 볕이 잘 드는 주말이다. 아영이는 잠시 외출을 하고 돌아온다. 온갖 청소도구를 들고 온 아영이, 그리고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 거기에 말랑이의 장난감, 말랑이의 쿠션, 말랑이의 애착 인형을 전부 쑤셔 넣는다. 시선이 떨린다. 아영이는 지금 이성적이지 못하다. 아영이는 이게 정답이라는 듯 박박 닦고 문지르고 쓸고 닦고를 반복한다. 말랑이의 흔적을 지운다. 탈취제를 든다. 말랑이의 고소한 냄새, 땅콩 냄새, 분유 냄새, 우리가 사랑하던 냄새를 벅벅 지운다. 나에게도 매캐한 탈취제를 퍽퍽 뿌린다. 나를 끌어모아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팍팍 넣고 세탁기 전원을 켠다. 나는 거품을 내뱉으며 생각한다. 우리 정말 잊어? 털 뭉치가 처음 집에 온 날을 기억한다.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 짜구난 배, 너는 냄새를 쫓으며 평생 사랑할 것처럼 굴었잖아. 애초에, 잊을 수 있어? 넌 그냥 분풀이하고 싶은 게 아니고?
나는 잘 짜인 면 틈 사이에 온 힘을 쥐어짠다. 세탁을 마치고, 아영이는 나를 볕 좋은 곳에 옮겨 바싹 말린다. 그 사이 아영이는 모든 청소를 마치고 조금 개운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당장은 행복해 보인다. 아영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늘 바라고 있다.
내가 보송해졌다. 아영이는 나를 차곡차곡 접는다. 내가 소중히 붙잡고 있던 걸 아영이에게 건넨다. 아영이는 운다. 다시 한번 펑펑 울곤 바닥에 쓰러지듯 앉는다. 우린 잊지 못한다. 고소한 볼 냄새, 배에서 나는 분내, 여유로운 꼬리 놀림과 따뜻한 체온. 평생 마음속에 담고 살아야 한다.
나는 아영이에게 말랑이의 빠진 털을 건넸다. 톡, 톡,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별로 간 우리 집 고양이 나나(가명)의 이야기이다. 나나는 추운 겨울날 떠났다. 나나를 떠나보낸 다음 날, 장을 볼 일이 있어서 코트를 입고 엄마랑 마트로 갔다. 추워서 코트를 꼭 껴안았는데 코트 옆이 하얀 털 투성이였다. 나나는 생전에 바로 이 코트 옆에 몸을 부비고 앉아 몸을 녹이곤 했었다. 그걸 까맣게 있고 코트를 입었더니 허연 털투성이가 된 것이었다. 나는 까르르 웃으면서 엄마한테 이것 좀 보라고 이거 다 나나 털이라고 말하다가 엉엉 울었다. 엄마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 와선 돌돌이로 전부 털어버렸다. 그래도 나나의 털은 코트에 한 두개정도 콕콕 박혀있었다. 떼어내면서 많이 울었다. 나나가 많이 보고싶다. 3년이 지나도 보고싶고 10년이 지나도 보고싶을거고 죽을때까지 보고싶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