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부탁드립니다

괜찮을 거야, 아마도

by 미미




제목 : 잘 부탁드립니다




“나 이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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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는 거센 바람에 목소리를 실었습니다. 은여우는 깜짝 놀랐습니다. 잠깐, 어딜? 집으로. 은여우는 미미의 원피스를 마구 긁었습니다. 그건 잘못됐어, 미미가 머리를 도리도리 저어버리자, 여름빛을 머금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미미는 허리를 숙여 나뭇가지 하나를 집고 볶은 머리를 시원하게 긁었습니다. 미미는 사람이라서, ‘여름잠’이 필요합니다. 동물은 ‘겨울잠’, 사람은 ‘여름잠’. 세상의 규칙이 그렇지 않습니까? 뜨거운 볕이 은여우의 꼬리 끝을 태웠습니다. 꼬리를 흔들며 그 리듬을 끌어올려 머리를 부르르 털었습니다. 은여우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은여우는 이미 겨울잠을 자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은여우는 챙겨놓은 개암 열매와 사과, 저장해놓은 딸기잼을 챙기고 미미에게 다가갔습니다. 같이 갈 심보로 말이죠. 미미는 크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아, 볕에 마른 가지가 맥없이 흩날렸습니다. 곁에 있던 개미가 괜히 휘말려 뒹굴 굴렀습니다. 뒹굴, 뒹굴. 미미는 텁텁 손을 털었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은여우는 꼬리를 말고 귀를 내렸습니다. 천천히, 산에서 내려갔습니다.


은여우와 미미는 도시 앞에서 멈춰섰습니다. 은여우의 기침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짙은 매연 연기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은여우가 계속 콜록거렸습니다. 미미는 은여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너는 돌아가자, 라고 말했습니다. 은여우는 거절했습니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니 두 사람 앞에 무언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인도를 마구 휘저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거칠구나, 은여우가 말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야, 미미가 검지를 들어 위쪽을 가리켰습니다. 우린 골목을 한참 올라야 해. 은여우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겠어, 알고 있어. 은여우가 몸을 털자, 개암 열매 하나가 바닥에 데굴 떨어졌습니다. 데굴, 데굴. 캐모마일 머리핀을 한 여자아이의 발꿈치를 간지럽혔습니다. 개다! 아이가 은여우를 가리켰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눈을 가렸습니다. 보지 마, 말 걸지 마. 은여우가 미미를 바라봤습니다. 미미는 피식 웃었습니다. 웃는 미미의 모습을 보고 은여우도 웃었습니다. 왜 웃는지, 은여우는 알지 못했습니다.


마트에 들러서 과일을 샀습니다. 미미가 사과를 만지면 점원이 사과를 버렸습니다. 포도를 만지면 포도가 사라졌고요. 미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점원은 미미와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은여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은여우는 꼬리를 말고 살랑살랑. 꼬리 끝에 고추가 만져집니다. 가려워서 긁고 싶었습니다. 은여우가 다리를 들자, 점원이 소리쳤습니다. 오줌은 안돼! 미미가 말했습니다, 얘 오줌 가릴 줄 알거든요? 미미는 포도 한 송이를 들고 빠르게 계산했습니다. 봉투에 넣고, 밖으로 나와 계단을 올랐습니다. 계속 올랐습니다. 해가 너무 뜨거웠습니다. 은여우의 등이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미미의 정수리에 기름기가 올랐습니다. 미미가 말했습니다, 밖에서 고추 긁지 마. 은여우가 말했습니다, 미안해.


미미는 도시의 가장 꼭대기,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올랐습니다. 오르고 또 오르고, 민둥산 같은 이마에 땀방울이 흘렀습니다. 코끝에 맺혀 인중으로 내려갔습니다. 미미가 핥아보니 짠맛이 돌았습니다. 인중 전부 짠맛이 돌았습니다. 낼롱이며 걸어가는 미미를 보며 은여우는 배가 많이 고픈 줄 알았습니다. 포도를 바라봤습니다. 연두색 포도, 샤인머스캣. 맛있는 과일에는 아름다운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블랙 사파이어 포도, 루비 키위, 꽃사과. 재밌었습니다. 은여우가 킥킥댔습니다. 다 왔어. 낡은 집 손잡이에 열쇠를 밀어 넣고, 미미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대나무로 된 장판, 작은 창문, 싱크대, 자개장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미미가 문을 열어놓은 채로 드러누웠습니다. 은여우가 옆에 따라 누웠습니다. 무섭지 않아? 뭐가? 문을 열어놓아도 돼? 여기 훔쳐 갈게 뭐 있어. 자개장? 제발 가져갔으면 좋겠다. 저게 사라지면 해먹을 놓을 거야. 거기서 죽을 때까지 여름잠만 잘 거야. 은여우가 낑낑대자, 미미가 말했습니다, 말이 그렇다고. 일어나 자개장으로 다가가더니 날이 무딘 바리깡을 꺼냈습니다. 너 배털 좀 깎자. 은여우가 깜짝 놀랐습니다. 더워 보여서. 우리 집 많이 더워. 너 그대로 자면 쪄 죽어. 은여우가 낑낑대며 드러누웠습니다. 미미는 시원하게 배털을 밀어줬습니다. 사각 모양으로 잘린 배털 사이로 은여우 고추가 드러났습니다. 미미가 웃었습니다. 많이 컸네, 은여우. 은여우가 온몸을 흔들자, 은색 털이 구름처럼 나풀거렸습니다. 미미는 털을 치우고 과일을 씻어둔 다음 물 한 잔을 마셨습니다. 대문을 열어놓고 창문도 열어뒀습니다. 방충망을 내렸고 대나무 장판에 드러누웠습니다. 은여우도 밍밍 돌더니 똬리를 틀었습니다. 미미는 누더기 원피스만 입은 채 잠을 잤습니다. 잠들기 전, 은여우가 미미에게 말했습니다. 언제 일어나? 난 오래 안자, 일어나서 과일 먹고, 개암으로 도토리묵도 쑬 거고, 또 잘 거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산책하다 또 잘 거야, 일어나면 딸기잼으로 토스트 먹어야지. 자주 많이 잘 거야. 그러면 여름이 끝나? 여름잠은 그래, 사람이 그래. 이불 안 덮고 자면 감기 걸릴 거야. 더워 죽겠는데 무슨 소리야? 너는 털도 없잖아. 원피스 안에 팬티만 입었잖아.


누가 도와주겠지.


미미가 잠들었습니다. 정말? 은여우의 질문에 답이 오진 않았습니다. 은여우도 잠에 들었습니다. 바람이 커튼을 간지럽히자, 분홍빛 아지랑이가 펼쳐졌습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짹짹거리며 우는 소리는 새 울음소리인지, 어미 잃은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습니다. 미미가 다리를 벌리자, 원피스는 말려 올라가 살구색 팬티가 드러났습니다. 미미는 가려운지 팬티 속에 손을 집어넣고 벅벅 긁었습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망측하다 소리쳤지만, 이내 누가 볼지 몰라 슬며시 문을 닫아줬습니다.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감사한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은 익스의 잘 부탁드립니다에서 따온 것이다. 엉망으로 면접을 망쳐 자포자기로 노래나 부르는 이 노래는 나를 나타내는 노래이기도 하다. 나는 잘해보고 싶은데 잘 안되는 사람이다. 그래도 그냥 에헤라디야~ 하고 대충대충 넘기면서 살고 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편 소설 또한 나를 나타내기도 한다. 사람과 섞이기 힘들고, 나 또한 표독스럽게 사람을 대하고 있지만 나만의 방이 있고 여유도 있고 이래나저래나 사람을 믿고 있다. 사람들은 날 미워하지만(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사람이 좋다. 사람의 선함을 믿는다. 이래저래 모자람도 많고 사람도 많이 순수하고 바보같이 당할 때도 많지만, 뭐 사람이 실수 좀 할수 있잖아요?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여담으로 계속 올린 고양이 사진은 그냥 자랑용이다. 좋은 카페에 갈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낯선 고양이 : 동물의 숲) 인형을 들고 사진을 남겼다. 통일성을 넣고 싶어서 추가해봤다. 예쁘게 봐주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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