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벽 앞에서
어떤 벽은,
서로를 가로막기 위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 서 있다.
그날, 우리 사이에 세워졌던
차갑고 단단했던 벽처럼.
그날 아침, 숨이 막혔다.
밥을 먹다 말고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조이고, 숨이 턱 막혔다.
처음 겪는 공황 증세였다.
그땐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저 “숨이 안 쉬어져…”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잠깐 걷고 올게.”
아내는 피곤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 지금 밥 먹는 중이야.
잠깐만 애 좀 봐줄 수 없어?”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의 답답함이 모든 감각을 삼켜버렸다.
내 고통이 너무 커서,
그녀의 고단함조차 멀게만 느껴졌다.
“지금 숨이 안 쉬어진다고!
내가 언제 이런 적 있었어?”
터져 나온 말엔
당황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오빠,
나 하루도 밥 한 끼 편히 먹어본 적 없어.”
그녀의 말이
내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죄책감과 외로움이 몰려왔지만,
이해받지 못한다는 감각이
더 깊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아내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조금씩 몸을 가라앉혔지만,
내 안의 소용돌이는 여전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는 어쩌면,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아내에게 줌으로써
나 스스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이해받아야 할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그저 자신의 밥 시간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런 식이면 집에 들어오지 마."
그녀의 문자 한 줄이,
마지막 남은 마음의 기력마저 앗아갔다.
엄마가 받았어야 할 사랑,
내가 받았어야 할 사랑.
그 오래된 결핍들이,
결국 다시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한참이나 길을 헤맨 뒤에,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녁이 되어서야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고, 나도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반가움에,
우리는 동시에 베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서로에게 날을 세웠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고,
나는 말없이 벽을 바라봤다.
그때, 두 살배기 아이가 우리 사이를 오가며,
불안한 눈빛으로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보았다.
그 모습에,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 앞에서, 이렇게 되면 안 돼.’
마음속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 아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또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과 지침, 그리고 아주 희미한 연민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싸우고 싶지 않아.
지금 말하면, 또 서로를 더 아프게 할 것 같아.
그냥… 지금은 이 일을 묻어두자.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동의는 억지스러운 화해가 아니었다.
서로의 상처를 더 깊게 후벼 파는 대신,
서로에게 '시간'이라는 유일한 약을 건네주자는 조용한 약속이었다.
서로의 가장 깊은 연약함을 목격하고도,
끝내 등을 돌리지 않겠다는
위태롭고도 간절한 약속.
그날 저녁, 우리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아침의 그 날카로운 침묵과는 달랐다.
서로의 숨결을 확인하고,
묵묵히 위로를 주고받는,
따뜻하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야,
조용히 그날을 꺼내 웃을 수 있었다.
“그때 왜 그러셨어요? 잘못했죠?”
“힘들었나봐. 지금이라면 안그러지. 미안해.
근데 오빠도 잘 설명해줬어야지.”
“놀라서 그랬나봐. 미안해”
긴 시간을 지나 가벼운 웃음이 된
우리의 말없는 화해는
그렇게 ‘두 번째 삶’의 한 페이지로 쓰여지고 있었다.
어떤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더 깊이 파고듭니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어쩌면
조금 더 기다리는 마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그 말 없는 시간의 힘을,
그날 나는 믿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