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으로 가득한 집
하루에 몇 개의 질문까지 답해줄 수 있을까.
나의 딸은, 매일 아침
그 한계를 시험하는 철학자처럼
(하지만 철학책은 읽어본 적없는)
내게 말을 건다.
말 없는 집에서 살아남았던 나는,
이제 질문으로 가득 찬 집에서
새로운 생존 전략을 배우는 중이다.
큰 아이는 눈 뜨자마자 입을 연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그 입은 좀처럼 닫히지 않는다.
'수다 머신'.
우리 집에서는 거의 고유명사처럼 불리는 별명이다.
사실 '기계 꺼'라는 버튼이 없다는 점만 빼면 꽤 정교한 모델이다.
그저 ‘딸’이니까 그렇겠거니 했지만,
내 아내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둘째 딸도 오히려 말수가 적은 쪽이다.
그러니 이건 단순히 성격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아마, 나라는 ‘청자’가 꽤 괜찮은 상대이기 때문일지도.
물론 나도 완벽하게 대화를 따라가진 못한다.
딸의 질문은 끝이 없고,
내 머릿속엔 해결 못한 일과 잊은 할 일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목소리톤이 갑자기 2옥타브쯤 올라가면
클라이막스임을 감지하고,
"아 진짜? 그래서?"되묻고 다시 합류한다.
어쩌면 이건 내 나름의 생존전략.
100% 몰입은 어렵지만, 적어도 이 공간의 평화는 유지해야 하니까.
최근에는 내가 집중하지 않는 것도 눈치를 챘는지
손짓발짓이 많아졌다.
이제는 그 현란한 몸의 추임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
"아빠 내 말 듣고 있지?"
가장 힘든 건 퇴근 직후다.
현관을 열자마자 날아드는 질문 폭탄은
그야말로 ‘말의 소나기’.
“아빠는 파란색이 좋아, 빨간색이 좋아?”
“그럼 파란색은 왜 좋아?”
“파란색보다 보라색이 더 예쁜 거 아냐?”
우주에 가면 뭘 하고 싶은지,
무인도에선 어떤 음식을 먹을 건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쯤 되면 철학 토론인지, 생존 인터뷰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며칠 전, 학교 참관수업에서 선생님이 물으셨다.
“학부모님은 아이에게 어떤 걸 가장 바라고 계세요?”
나는 조심스레, 진심을 담아 말했다.
“...숙제를, 조금 많이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이 웃으셨다.
그 순간만큼은, 딸의 수다 에너지가
문제집으로 향하길 바랐던,
한 아버지의 은밀하고 절실한 기도였다.
(사실은 학습습관이 이유였습니다. 아니, 네. 둘 다였죠.)
그날 밤, 아이의 끊이지 않는 말들을 들으며
문득, 조용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렸다.
수저 소리만 났던 밥상,
티비 소리로 덮여버린 침묵,
아버지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나날들.
아마도 그 시절에도 분명 감정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없었던 그 집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흩어지고, 억눌리고, 결국 곪아갔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이 벅차고 정신없는 수다는
나에게는 너무도 낯선 풍경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말들이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 시리도록 감사하다.
말 없는 집에서 자라,
질문으로 가득 찬 집에서 살아가는 아버지.
그 끝없는 말들은
나를 지치게도 하지만,
결국 나를 채워가는 또 하나의 사랑의 언어다.
나는 지금도
유쾌한 체념과 벅찬 다정함 사이 어딘가에서
조금씩, ‘아빠’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아빠 내가 질문을 많이 해서 힘들어?"
"음 그럴 때도 있는데 아빠는 너랑 이야기할 때가 제일 좋아."
내 어린 시절의 집을 가득 채웠던 것은
소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었습니다.
아이가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이 자신에게 안전하다고,
그리고 아빠라는 존재가 가장 믿을 만한 대답을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가장 큰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그 믿음 앞에서, 나는 오늘도
기꺼이, 조금 더 시끄러운 아빠가 되어보기로 합니다.
(적어도, 수다의 30%는 숙제로 돌릴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