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보통날

기적같은 하루

by 준희최

어린 시절, 나의 세상은 조용했다.

숨소리마저 눈치를 봐야 했고,

모든 감정은 침묵 뒤에 숨겨야 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꿈꿨다.


하지만 나의 두 번째 삶은,

내가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모습으로 찾아왔다.

시끄럽고, 정신없고, 엉망진창이지만

나에겐 이상하게도, 완벽한 모습으로.




"음, 오늘도 똥국이군."


군대 시절의 기억 때문에 내가 질색하는 음식이 두 가지 있다.

카레, 그리고 된장국.

아이들은 된장국을 ‘똥국’이라 부르며 꺄르르 웃는다.

공교롭게도, 아내가 가장 자주 하는 요리다.


"주는 대로 드세요."


아내의 말에 나는 군소리 없이 숟가락을 든다.

똥국을 주제로 또 한참을 떠드느라, 주말 아침이 시끌벅적하게 길어진다.

내 어린 날의 아침은, 밥알 넘어가는 소리마저 눈치가 보이던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 기억 위로, 아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낯설게, 그리고 따뜻하게 겹쳐온다.


그날, 우리는 창덕궁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담벼락 너머로 햇살이 넘실거렸다.


요즘 아이들은 제법 커서,

엄마 아빠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야단이다.

결과물은 대부분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아이 손가락이 주인공이 되거나,

다리가 애매하게 잘려 나오기 일쑤다.


"아빠는 내 생각도 안 해? 나는 다리가 너무 아프단 말이야!"


더 걷고 싶은 내 욕심에, 결국 큰아이가 투정을 부린다.

나는 아이의 손을 살며시 잡고 앉아 조곤조곤 말한다.

조금만 더 걷고, 맛있는 밥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자고.


아이를 잠시 혼자 걷게 했더니,

조금 뒤 조용히 내 소매를 톡톡 두드린다.

고개를 든 아이가 속삭인다.


"아빠, 아까 짜증 내서 미안해. 배고파서 그랬어."


"그래 괜찮아, 너 아침에 까부느라 밥 조금 먹더라."




나는 부모님과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솔직한 감정의 언어를 나눠본 기억도 없다.

어릴 적의 나는 조용히,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문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이 장면이,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아름답다.

내가 몰랐던 세상이 오늘 막 시작된 것처럼.


지하철 창밖으로 석양이 퍼진다.

나는 그 빛 속에서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감는다.

투정과 화해, 웃음과 사과가 한 폭의 풍경처럼 스쳐간다.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웃는 이 단출한 여정이

이토록 귀한 줄, 나는 예전엔 정말 몰랐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 내 앞에서 엉덩이 춤을 춘다.

어디서 배웠는지 "우가우가!" 소리를 내며

작은 맨살을 눈앞에 들이민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많은 엉덩이를 보게 될 줄 몰랐다.

체념한 듯 "그래, 그래" 하면서 로션을 발라주고 머리를 말려준다.

피곤함에 눈을 비비는 아이의 모습이,

문득 사무치게 사랑스럽다.


나도 이랬을까.

그 시절, 어머니도 이런 나를 보며 잠시나마 웃으셨을까.

아니면 하루를 버텨낸 안도감으로 겨우 숨을 돌리셨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목울대를 타고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방에 홀로 남는다.

낮에 마주쳤던 다른 가족들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이의 떼쓰는 모습, 목마를 태운 아빠의 웃음,

동생과 다투며 금세 화해하는 소리.

그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웃고 있던

우리 가족의 모습도 겹쳐본다.


오늘 하루, 내가 마주했던 모든 순간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든 '보통날'의 풍경이었다고.


나는 두 번째 삶에 이르러서야,

이 평범한 날들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나라면 결코 견디지 못했을 소란과 투정과 무례함.

그 모든 것이 실은 ‘안전함’ 속에서만 피어나는

자유의 다른 이름임을 이제는 안다.


어떤 이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하루일지 모를 오늘이,

또 어떤 이에게는 가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날일 수 있다.


나에게는 참으로 길고도 험난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모든 풍경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하고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마음 다해 살아내는 것 —

그것이 내가 마침내 도착한,

기적과도 같은 보통날이다.






작가의 말


상처가 깊었던 사람일수록,

평범한 행복의 무게를 더 절실히 느낍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햇살이,

오랜 어둠 속에 있던 사람에게는

기적처럼 다가오듯이요.


나의 '두 번째 삶'은

거창한 성공이나 특별한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의 서툰 투정을 받아주고,

의미 없는 농담에 함께 웃고,

가족의 저녁 식탁을 말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보통날'도

사실은 누군가의 간절한 기적일지 모른다는 생각 —

그 따뜻한 시선이

당신의 오늘을 조금 더 충만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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