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이름의 계절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by 준희최

내 삶의 오랜 겨울은,

한 사람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 끝이 났다.


우리는 함께,

굳어있던 상처의 땅을 눈물로 일구고,

작은 이해의 씨앗을 심고,

아주 오랜 시간 기다림의 물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라는 이름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그 글에 나온, 오빠 어릴 적 이야기.

그 아이, 너무 안쓰럽더라.”


“그래서 내가 안아줬잖아.”


내가 쓴 글을 읽은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문장들을 써 내려갔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눈치였다.


아내는 나의 글쓰기를 묵묵히 응원해준다.

어디든 노트북을 들고 다니고,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끄적이는 나의 시간을 온전히 존중해준다.


“그래서, 오빠는 좀 괜찮아진 거야?”


“마법처럼 뿅 하고 괜찮아지는 건 아니지.

이제, 괜찮아지는 길 위에 서 있는 거야.

우리 가족 모두가.”

나는 그 말을 하며 울컥, 눈물이 핑 돌았다.


“또 울어? 이번엔 왜?”


“그 길이… 어쩌면 그냥 희망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

묵묵히 내 말을 받아들이는 눈빛이었다.

아내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을거야. 우리가 왜 그래.

오빠가 겪어온 일도,

그 글도 다 의미가 있지.”


그 무심한 듯 단단한 위로 앞에서,

나는 또 다른 과거의 한순간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아내 또한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혼 전, 어른들에게 예쁨 받으며 자신만만해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우리의 시작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아버지는 모든 상황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했고,

그 과정에서 아내와 장모님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심산으로

결혼을 무기한 연기하자고 했을 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둘만 도망가서 살까?”


나는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한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던 나를, 그 한마디가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나약한 나를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꺼이 함께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내어

모든 고난을 헤치고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 말은,

아주 가끔 내가 그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덧붙이는 우리만의 주문이 되었다.


'행복하게 살자.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그 말 때문인지 우리는 결혼 이후

둘이서 여러 곳을 여행하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나는 여행과 외식이라는 것이

늘 신기하고 신선했다. 그 어설펐던 추억이,

달콤하고

쌉싸름하게

미소를 남기고 사라진다.




뒤척이는 소리에

아내는 겁 많은 둘째가 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요한 집안을 둘러본다.


안방의 불빛은 거실까지 희미하게 이어져 있다.

식탁 위 널브러져 있는 책,

바닥에 뒹구는 장난감,

화장대 위의 가위와 종이들,

“엄마 아빠”라고 삐뚤빼뚤 적힌 아이의 그림.


“괜찮아, 괜찮아. 엄마 여기 있잖아.”


아내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나는 거실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둘째의 작고 따뜻한 몸이

아내의 품에 꼭 안겨 있을 장면을 상상했다.


벽에는 우리의 결혼사진이 여전히 걸려 있다.

오래돼서 다른 사진으로 바꾸려 했을 때,

아이들이 “엄마 아빠 결혼사진 없으면 자기들도 없는 거라며” 난리를 쳐서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 모든 평범하고 소란스러운 풍경을,

나는 가만히 눈으로 어루만진다.

이것이 아내와 내가 함께 만들어온 ‘두 번째 삶’의 모습이다.

내가 어릴 적 머물렀던, 숨 막히는 침묵의 공간과는 전혀 다른,

안전하고 따뜻한 세계.




나는 평생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만

내 삶이 비로소 시작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진짜 나의 삶은,

이 사람과 함께 아이들의 서툰 그림을 벽에 붙이고,

늦은 밤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

바로 이 사소한 순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곁에 늘 있었던 소중한 행복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시작이었다.


누구도 우리를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게 지나가고,

현실은 늘 차갑게 얼굴을 들이밀지만 —

여기, 우리 집만큼은

모든 것이 따뜻하고, 느리게 흘러간다.


비로소 나는,

우리가 함께 만든 이 계절 속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이 계절은,

겨울을 건너온 우리만의 봄이었고

오직 우리 둘만이 존재하는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작가의 말


나는 오랫동안, 행복이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찾아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 긴 시간을 지나오며

조금씩 깨닫습니다.


행복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문제들 속에서도

함께 웃어줄 사람이 곁에 있는 상태라는 것을요.


혹시 당신 곁에도, 그런 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 그 손을 한 번 더 꼭 잡아주세요.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도 위대한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keyword
이전 24화아버지의 뒷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