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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는 우리

오늘 우리가 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by KOSAKA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며 한장면 한장면 써내려가다보니 묘한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에 관철되는 하나의 단어, 바로 '부리다'라는 동사다.


국어사전에서 “부리다”라는 동사를 찾아보면 놀라울 만큼 다양한 예시가 나온다. 끼부리다, 애교부리다, 고집부리다, 성질부리다, 여유부리다, 솜씨부리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목록이 곧 한 사람의 인생을 압축한 듯하다. 태어나서 늙어갈 때까지,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부리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의 나는 철없는 “어리광부리기”의 달인이었다. 부모가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칭얼대며 응석을 부렸고, 갖고 싶은 장난감을 얻기 위해 떼를 쓴 적도 많았다. 그때의 ‘부림’은 생존을 위한 본능 같은 것이었다. 아직 세상에 대한 언어와 기술이 부족했던 아이에게, 어리광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끼부리다”라는 표현이 내 일상 속에 들어왔다. 그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는 은근한 경쟁과 관심의 교차였다. 누군가는 패션으로, 또 누군가는 농담으로, 다른 이는 공부로 자기만의 끼를 부렸다. 나 역시 음악 취향을 과시하거나, 누군가 몰래 연습한 장기를 꺼내며 인정받기를 바랐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끼부림이란 결국 “나를 봐 달라”는 외침이었고, 서로를 향한 부끄럽고도 간절한 신호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또 다른 ‘부림’이 있었다. 바로 “억지부리다”였다.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 우기는 일, 자신이 틀렸음을 알면서도 굳이 물러서지 않으려는 태도 말이다. 부모와의 다툼 속에서도, 친구들과의 언쟁 속에서도 억지는 빠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억지란 어쩌면 미숙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기 논리로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나이, 아직 양보와 타협을 배우지 못한 나이에 꼭 한번은 거쳐야 하는 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발을 들이니, ‘부리다’라는 동사의 무게가 달라졌다. 직장생활은 수많은 사람과 부딪히는 과정이었고, 그 속에서 가장 자주 드러난 것은 “고집부리다”였다. 옳다고 믿었던 방향을 끝내 굽히지 않으려는 태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섞인 자기주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협업을 방해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했음을 깨달았다. 고집은 어떤 경우에는 신념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벽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부림’을 배우게 되었다. 바로 “사람을 부리다”라는 경험이다. 사회에 들어가면 누군가의 지시를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기도 한다. 사람을 부린다는 것은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 마음을 살피고, 일과 감정을 함께 조율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람을 잘 부린다는 것은 결국 권위가 아니라 배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솜씨부리다”와 “멋부리다”의 순간들도 있었다. 작은 일이라도 맡은 일을 제대로 해냈을 때, 칭찬을 받으며 솜씨를 드러낼 수 있었다. 중요한 발표 자리에서 옷차림에 힘을 주던 멋부림도 있었다. 물론 그 멋은 누군가에게는 과시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시절 내게는 자신감을 유지하는 방패였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여유부리다”라는 말이 조금씩 내 삶에 자리를 잡았다. 예전 같으면 서둘렀을 일 앞에서 굳이 급히 나서지 않고, 조금 늦더라도 웃으며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가는 시기다. 여유란 노력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집 끝에야 비로소 생기는 태도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부리지 않는 것”의 가치를 배우고 있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불필요한 성질을 부리지 않으며, 때로는 멋조차 부리지 않으려 한다. 삶은 결국 ‘무엇을 부리느냐’의 기록인 동시에, ‘무엇을 더 이상 부리지 않느냐’의 배움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어리광 부리던 아이가 끼를 부리며 청춘을 지나, 억지를 부리며 미숙함을 거치고, 고집을 부리고 사람을 부리며 사회를 배우고, 솜씨를 부리며 자리를 잡고, 결국 여유를 부리며 다시 내려놓음을 배우는 여정이었다. 부리다라는 단어는 한 사람의 생애를 꿰뚫는 은유처럼 다가온다.


오늘 당신이 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이 연재의 시작점이 됐던 나의 당뇨도 '먹부림'으로 시작됐다....그런 건 부리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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