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런치 작가 우재 박종익님의 브런치북 <시가 있는 풍경>에 대한 저의 짧은 서평입니다.
이 시집은 감정을 앞세워 독자를 설득하기보다, 풍경을 먼저 세워 마음이 그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만드는 방식을 일관되게 취하고 있습니다. 창가의 빛, 얇게 흔들리는 커튼, 식탁 위의 따뜻한 잔, 오래된 도구와 생활의 소리 같은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배치되는데, 이 반복은 단순한 취향의 고집이 아니라 시집 전체를 하나의 온도와 리듬으로 묶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덕분에 개별시의 목소리는 서로 다르지만, 책을 덮고 나면 하나의 긴 숨을 쉰 듯한 인상이 남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이 시집을 “태도의 기록”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시적 화자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사물을 대하고 시간을 만지는 방법이 독자에게 오래 남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태도는 절제와 여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시집은 감정을 선언하거나 결론을 먼저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사물과 행위, 냄새와 소리의 층위를 차분하게 포개며 의미가 스스로 응결되도록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독자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백이 넓을수록 독자의 경험과 기억이 말을 걸 수 있는 자리가 커집니다. 각 시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것이 답이다”가 아니라 “여기까지 함께 보았다”는 체험이 됩니다.
내용의 축은 일상과 기억, 그리고 윤리입니다. 이 시집은 화려한 사건이나 대서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동네의 풍경, 집 안의 오브제, 손끝의 노동을 불러내면서 삶의 태도를 묻습니다. 오래된 그릇의 그을음, 아이들 놀이의 잔광, 동네 기술자의 손길 같은 이미지들이 등장할 때, 시선은 과거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보여주기’가 철저합니다. 시는 먼저 만지고, 냄새 맡고, 듣고, 그다음에 생각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독서는 개념의 언덕을 오르기 전에 감각의 낮은 들판을 충분히 걸어가게 됩니다.
행갈이는 호흡을 세심하게 통제하며, 의미 단위가 ‘끊길 듯 이어지는’ 지점에서 자연스러운 멈춤을 유도합니다. 언어의 과장이 없고, 감정의 고조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장치가 드뭅니다. 그 대신 반복과 변주가 리듬을 만듭니다. 빛과 바람, 물과 도구, 손과 숨 같은 모티프가 편마다 다른 조합으로 배치되어, 한 권 전체의 음색을 통일합니다.
시집의 세계는 개인의 내면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동네의 가게, 작은 공방, 길의 소리, 계절의 호흡이 빈번히 호출되면서 공동의 시간과 장소가 세밀하게 살아납니다. 이때 공동체는 구호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물, 노동과 돌봄이 맞물리는 일상의 접점에서 묵묵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위로 역시 문장 자체보다 풍경의 상태로 제시됩니다. 바람이 들어오고, 잔이 식고, 그림자가 옮겨 가는 동안 마음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장면들—이것이 이 시집이 선택한 위로의 방식입니다. 독자는 “위로받았다”라고 말하기보다 “조금 나아졌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사진과 텍스트가 함께 놓이는 플랫폼의 특성도 작품의 미학과 잘 맞습니다. 시인은 이미지에 기대어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사진은 시의 감각을 쓸어 올리는 프레이밍으로 기능합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를 떠밀지 않고, 각자의 온도로 나란히 갑니다. 이 균형은 읽기의 속도를 안정시키고, 각 행과 문장이 놓여 있는 물리적 공간감까지 인식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시를 “읽는다기보다 경험한다”는 감각을 얻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남는 것은 몇몇 인상적인 구절보다, 태도의 목록입니다. 사소한 것을 대하는 법, 오래된 것을 버리지 않는 법, 상처를 둘러싼 미안함을 말이 아닌 손길로 건네는 법, 숨을 길게 고르는 법. 이 목록은 덮는 순간 비로소 효력을 발휘합니다.
독자는 같은 창을 다시 열어 보고, 같은 골목을 다른 속도로 걸으며, 같은 물건을 이전과 다른 촉감으로 만지게 됩니다. 시가 삶을 바꾼다는 말이 과장처럼 들릴 때가 있지만, 이 시집은 그 말을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이 시집은 감정을 낮추고 풍경을 앞세우며,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현재의 윤리로 재독해하고, 추상 대신 감각으로 설득합니다. 플랫폼의 매체성—텍스트와 이미지의 병치—을 작품의 호흡과 조율해, 한 권 전체의 음색을 녹음하듯 고르게 유지합니다. 그 결과 독자는 개별시의 인상에 머무르지 않고, 책 전체의 온도와 리듬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