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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의 자녀양육기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by 방구석 관찰자

나로 말하자면, 학창 시절에 이를 악물고 공부한 것도 아니고, 적당히 열심히 한 경우라서, 최상위권들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따위는 모른다. 그저,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로서 억울하게도 담임선생님이 하향 안전 지원을 심하게 종용했다는 것에 불만이 조금 있었을 뿐, 내 능력은 여기까지 인걸, 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러 인생의 고비를 만나고, 또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부 성적과 대학 레벨, 고소득의 직업 등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희미하게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첫째 아이를 양육하면서, 내 아이가 천재는 아닐까, 어이없는 의문을 품었을 때도 있고, 어쩌다 아이가 책을 집중해서 보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바로 전집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 넣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점점 또래들이 즐기는 게임에 몰두하거나, 복잡한 수학 문제는 넌더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비교적 쉽게 내 아이의 진짜 모습을 수용했다. 내 공감력이 지나치게 탁월했을까? 나라도 이렇게 재미난 게 많은 세상에서 그 많은 자극들을 무시하고 공부에 몰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난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을 정도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내 아이가 나를 뛰어넘는 업적을 이룬다면 그것은 로또의 확률로 오는 행운이다.


젊은 나이에 비교적 일찍, 희귀 난치질환을 얻은 것도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걷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생의 유한함과 남들보다 일찍 신체의 제약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생을 한 맺힌 듯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저, 자기 밥벌이할 정도의 경제적 독립만 이루면, 그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다가 죽어도 모자랄 인생이라고 말이다. 치열하게 살면서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가나, 피라미드 맨 아래에서 편하게 베짱이의 인생을 사나,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둘째를 유모차에 태워야 하는 꼬맹이였을 때도, 우리 가족은 부지런히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다. 주 5일 근무가 되자마자, 금요일 저녁은 무조건 떠나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에 맞닥트렸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머리를 모으고 전우애를 다졌다. 첫째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 인자해 보이는 교장선생님은 졸업생 모두 자신의 꿈이 적힌 푯말을 들고 찍힌 사진을 잔잔한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형식으로 학부모들에게 보여주었다. 비록 초등학교 졸업생이지만, 모두 근엄한 표정으로 의사, 판사, 교수, 00대기업 회사원 등을 들고 있었다. 내 아이 차례가 되었는데, 내 아이의 꿈이 ‘평양냉면집 사장’인 줄은 나도 처음 알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아이에게 물어보니 ‘돈 많고 유명하지 않은 백수’라고 업데이트해 주었다. 참 친절한 녀석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 사실, 거의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내 생각을 입밖에 잘 꺼내지 않는다. 멋모르고 말을 꺼냈다가 한심하다는 눈빛의 레이저들을 무자비하게 맞고, 이야기의 바깥으로 완전히 밀려난 경험을 몇 번 한 이후로,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내 생각은 속으로 삼킨다. 아이 교육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무조건 경청하기, 무조건 고개 끄덕이기 스킬만 유효하다. 교육열이 강한 다수의 의견에 한 번이라도 배치되면, 그 모임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되고 얼마 못 가서 아이를 방임하는 엄마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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