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직업수집가가 되었는가?
교사를 그만둔 뒤, 나는 수많은 일에 도전했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도중에 그만두었지만, 사실은 견디지 못하고 내쫓긴 적도 많았다. 나는 “노동”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사유와 성찰을 했고, 지금, 그 이야기를 “노동에 대한 예의”라는 글로 풀어보고자 한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도전하고 경험했던 여러 직업의 세계에서 겪었던, 내밀한 일기일 수 있다.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겠다. 가만히만 있어도 인상되는 월급을 따박따박 받는 직업을 때려치운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반감이 있을 수 있다. 또는, 취미생활처럼 직업의 세계를 탐험하고 다니는 내가 자신처럼 생계형 노동자가 아닌 것에 크게 실망하고 감정이입에 실패해서 이 글을 덮어 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명퇴할 당시, 동료들에게서 부러움을 가장한 질시의 말들을 많이 들었고, 구직현장에서도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왜 나왔냐는 면접관의 말은 부지기수로 들었다. 나는 바로 전직 교사라는 가장 큰 경력을 이력서에서 지웠지만, 실제 근로 현장에서는 말로 표현 못 할 묘한 분위기에서 이내 시기와 왕따의 대상에 올라간 적도 많았다. 친했던 지인은 취업 준비 중인 자녀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나의 합격 소식을 듣고서, 젊은 사람들 일자리를 다 뺏어간다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Who cares?”
이것이 그들에 대한 나의 답이다. 한국어로는 “무슨 상관이람!” 정도가 되겠다.
다 쓸모없는 반응들이다. 나는 나만의 길을 갈 것이고, 그것은 틀린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다. 그리고, 내 여정을 성실하게 글로 표현하겠다. 이미, 그런 길을 6년간 걸었고, 일간지에 칼럼을 썼으며, 내 책을 기획 출판했다.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일에 주눅 들지 않고, 그들이 뭐라건, 아무 동요가 없다. 나는 내 이야기를 경청해 줄 사람들에게 내 진심이 닿기만을 바랄 뿐이다.
21년을 학교에서 근무했던 나는 ‘교육’이라는 유일한 능력을 활용하여, 수학학원을 차렸다. 나름, 입지 분석도 하고, 내 교수 능력에 대해 자기 객관화도 하면서, 초중등 학생 대상 수학 보습학원이라는 합리적 도출을 끌어냈다. 아파트 세대수, 상권분석, 학생 수, 학생들의 선행수준, 인근 학교 규모, 등등의 분석을 끝내고 아파트 상가 내 작은 학원을 열었다. 기존에 운영되던 수학 교습소를 150만 원의 권리금을 주고 인수하였는데, 기존 학생이 7명 있었다. 학생이 1명도 없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에, 그 정도 비용은 지출할 만했고, 무엇보다 그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초중등 학생 대상의 학원 운영 시간에 무척 만족했다. 2~3시부터, 6시까지는 초등생 천국이었다. 하교하는 아이들이 차례로 학원에 들렀고, 자기 책상에 앉아 교재를 풀고, 나와 채점, 질의 시간을 가졌다. 6시부터 8시까지는 중학생들의 시간이었다. 중학생들은 갑자기 어려워진 수학 수준에 적응하느라, 초등생들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공부에 집중했다. 아무리 시간을 여유롭게 잡아도 2시부터 8시까지 6시간 집중하면 그날의 영업은 끝났다. 나는 오전 시간을 이용해 운동을 하고, 하루에 짤막한 글이라도 쓰려고 노력했다. 퇴근하고 나면 가족들과 반갑게 상봉하고 소파에 조금 늘어져 있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하다가, 초등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너무 귀여워서 엄마의 마음으로 우쭈쭈하며 오답도 자상하게 고쳐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 아이들이 몰랐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면, 유레카라도 외칠 듯 환한 표정이 돼서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궁둥이라도 팡팡 두들겨 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단점은, 이 과정을 끝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풀이에 대해 한 번 알려주면, 그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그 단계를 뛰어넘는 학생은 소수고, 질문했던 문제를 또 가져오고, 자세히 이해시켜 주면, 그 때만 유레카를 외치고, 얼마 안 있다가 또 그런 유형의 문제를 가져왔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내 인내력을 시험했다. 나는 무섭게 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만만하게 선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호하고 해야 할 말만 딱딱 하면서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이 나를 우습게 보아서 같은 유형의 문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학습 태도가 그랬다. 자신이 스스로 고뇌하는 시간을 가져보지 않고, 모른다고 생각되면 바로 해답 풀이를 보거나, 질문으로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많은 사교육에 노출되어서 그런 듯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직 어려서인지, 고등학생들처럼 머리를 굴려 나와 기 싸움을 하거나 내 심기를 거스를 만큼 학습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의도한 대로 잘 따라오는 편이었다.
2학년 남자 꼬맹이 녀석이 있었다. 그 아이는 포동포동 귀여운 살이 올라 있었고, 하얀 피부에 누가 봐도 귀여워 뺨이라도 어루만지고 싶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런데, 놀랄 만큼 주의력과 집중력이 부족했고, 떼를 쓰면 모두 이루어지는 줄 아는 이른바 ‘문제 학생’이었다. 떼라는 것은 주로 소리를 지르거나, 교재를 구겨버리는 행동으로 나타났고, 그도 아니면, 앉아서 문제집에 북북, 낙서하기 일쑤였다. 나는 1주일간 그 학생의 태도를 지켜보다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어머님, 00이가 원래 이렇게 공부를 해 왔나요?”
“우리 00가 좀 산만하긴 해도, 머리는 좋아서 잘 따라가요.”
“어머님, 00이는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성적 향상도 어려워요. 제가 앞으로 단호하게 지도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물론, 가정에서도 도와주셔야 합니다.”
“00한테 큰소리치지 마세요. 지금까지 그 학원에서 아무 문제 없이 잘 다녔어요! 아직 어린 애인데, 혼을 낼 게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혼을 낸다는 게 아니라, 학습 태도를 고치는 데 주력하겠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문제 풀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00가 지금 하루에 2개씩 학원을 다니는데, 지금까지 어떤 학원에서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왜 원장님으로 바뀌고 나서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죠?”
나는 아연실색했다. 00는 00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분위기를 어지럽혔고, 00에게 잔소리하느라, 다른 학생들의 지도 시간이 종종 짧아졌다. 이런 상황을 지금까지 아무도 말한 적이 없다고?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모든 학원 원장이 이런 상황에 눈을 감는 것을 선택했거나, 이 학부모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그 두 가지 어떤 상황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영리 목적의 사교육을 직업으로 한다지만, 이런 상황까지 모른 척하면서 수업비만 챙겨서는 안 되었고, 주변의 열심히 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시간과 노력을 갉아 먹어서도 안된다. 특히, 나는 후자의 경우에 더욱 민감했다.
“어머님, 저는 00하고 이번 달까지만 만나도록 할게요. 00이는 재능이 있어서, 다른 학원에 가도 잘 배울 겁니다.”
나는 매출보다 중요한 건, 사업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공교육 이외에 추가로 더 배우고자 하는 학생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것이 먼저다.
00이의 어머니는 잠시 침묵했다.
“원장님, 00이가 뭘 잘못했죠? 잘못한 게 없는데, 학원에서 부당하게 말씀하시는 거 같아요. 그리고, 00이가 데려온 학생이 그동안 몇 명인지 아세요? 동네에서 소문 퍼지면, 학원 오래 못하세요.”
나는 00이의 어머니가 00이의 태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고, 여길 그만두면 딱히 갈 데도 없다는 걸 간파했다. 그래서, 협박 비슷한 으름장까지 동원하면서 해서는 안 될 말의 콤보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00이를 계속 받아주는 것은 내가 용납되지 않았다.
“어머님, 00이 교재 챙겨서 보내겠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뵙도록 하죠.”
나는 바로 전화를 끊었고, 00이는 다음 날부터 오지 않았다.
약 한 달 정도, 저학년 신입생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4학년 학부모가 아파트 커뮤니티 카페에 우리 학원이 입방아에 올랐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예상했던 내용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나는 그동안 00이한테 잔소리하느라 소홀하다고 느꼈던 아이들에게 더 시간을 배분했다. 애초에 석 달 동안은 손가락 빨고 지낼 것이라 계산하고 예산을 준비했기 때문에, 이참에 내가 계획했던 학원의 이상적인 모습을 짤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다.
한 달이 지났을까, 갑자기 초등학생 신입회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학생은 띄엄띄엄 증가추세였으나, 초등학생들은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상담이 들어왔다. 초등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엄마들은 아이 손을 붙잡고 무작정 학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이 상황에 놀랄 시간이 없었다. 번호표를 나눠 주듯, 상담 시간을 배정해서 다시 오라고 했고, 이때 1차로 떨어져 나갈 학생들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야만,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가능했다.
그러나, 모두 상담 시간을 꼬박꼬박 지켜서 방문했고, 더 이상 신입회원을 받기조차 부담스러워진 나는 초등생을 상대로 레벨 테스트까지 보았다. 예약 대기라는 희망 고문이 싫었고, 내 지도 방식을 받아들일 만한 학생인지 판별하고 싶었다. 물론, 어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줄 세우기를 하려는 목적은 아니었고, 레벨 테스트를 받는 과정에서 아이의 인성과, 어머니의 태도를 조심스럽게 가늠했다.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서로의 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벨 테스트는 핑계고, 서로가 서로를 조심스럽게 면접했다. 나는 학습 능력이 아닌 인성을 먼저 보고 등록 여부를 결정했고, 탈락한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고 표정이 일그러져서 돌아갔다.
원생 수를 늘리고 싶지 않은 나에게 두 달 만에 한계가 찾아왔다. 나는 구인 사이트에서 선생님을 구했고, 인접한 동네에 거주하는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선생님을 구하고 나니, 이제는 장소가 협소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 고용한 선생님의 교실과 내 교실을 구분해야 했고, 상담실이 별도로 필요한 지경이었다. 나는 예상했던 근로 시간을 넘겨서 학원에 있었고, 공간은 포화 상태여서 손발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는 상가 내 부동산을 찾아가 내가 있는 2층의 상가 중, 옆으로 확장할 만한 상가의 임대차 계약과 임대 가능 여부를 문의했다. 아쉽게도 기존 학원과 연결해서 쓸 수 있는 상가는 없었고, 통으로 임대해서 넓게 쓸 수 있는 곳이, 그 상가 안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학원이 문을 열기 전에 부동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차량까지 운행하고 싶지 않아서, 그 아파트 단지 인근의 건물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역시 부동산을 들렀다가 학원으로 들어가려는데,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상가 문제로 너무 피곤했나 싶었다. 확장에만 신경 쓰는 바람에 쉬지 못해서 그런가 해서, 역시 상가 내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받고 이석증이 의심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약을 먹고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나, 인생은 만만하지 않았다. 내가 의도한 대로 풀려나가나 싶으면, 바로 그 순간에 철퇴를 내린다.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고통이 디폴트가 맞는 것 같다.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번영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계획한 대로 척척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거 봐, 나는 내 능력을 발휘한 만큼 수확물을 가져가고 싶었을 뿐이라구. 정체된 공무원 조직에서 최대한 바짝 엎드려, 어떻게 하면 책임은 적게, 보상은 많이 가져가고 싶어 하는 못된 심보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나는 정직하게 내 능력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점프할 일만 남았고, 내 생각을 증명할 기회를 가졌다고 믿었다.
결과만 간단히 얘기하자면, 나는 대학병원 신경과에서 말초신경이상에 의한 어지러움을 판정받고 한 달 이상을 누워서 쉬어야 했다. 어지러움을 겪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워있어도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속은 메슥거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고통인지를. 나는 정확히 한 달 반 만에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당분간은 요양이 필요했다. 그 사이 학원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밖에 없었다.
어지러움을 견디며 누워있는 동안, 나는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왜 잊었는지, 내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신체적 조건이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왜 자꾸 까먹고 정상인처럼 행동하려고 했는지 후회했다.
나는 첫째, 인생은 계획한 대로 아웃풋이 나올 거라는 예전의 행동 패턴을 버리지 못했다.
둘째,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악한 신체적 조건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자주 잊는다.
이미, 자가면역질환으로 인생의 유한함을 깨우쳤고, 인간이란 미쳐 날뛰는 운명의 꼬리조차도 붙잡지 못하는 미욱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멍청하게도 같은 실수를 계속하는 것은, 나의 행동방식과 가치관이 뿌리 깊이 고착되었고, 깨우치기만 해서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수히 많이 정을 맞아야 모난 부분이 원만해진다는 걸 정을 맞을 때마다 기억해 낸다. 이 소동은 내가 이렇게나 부족한 인간임을 아직 인정 못 했다는 증거다.
몸은 누워있었지만, 마음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 나를 깎아냈다.
내가 A를 투입하면 A+가 나올 거라는 공식을 의식적으로 계속 부쉈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내가 공적으로, 윤리적으로 잘못한 건 없다. 그러나, 잘못이 없었어도 결과는 실패일 수 있다. 이것이 인생임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였다.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그것은 내 열매가 아니라고 나를 다독였다. 아직 때가 아니거나, 아니면, 내가 무의식중에 잘못된 자원을 투입해서 실패라는 아웃풋이 나왔을 수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보란 듯이 금의환향하겠다는 것이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다. 어쨌거나,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뒤로도 한동안 요양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동안 체력이 방전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어울리지 않게, 내 몸을 도자기 대하듯 해야만 했다.
나의 학원 운영기는 이렇게 단시간에 장렬하게 산화했으며, 짧은 시간 동안 흥망을 겪고 나니, 한동안 근로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때때로, 사실은 자주, 어린 학생들의 문자가 날아왔다. 언제 오냐고, 지금은 괜찮냐고 나를 기다리는 꼬맹이들의 문자가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인연 함부로 맺는 거 아니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뼈아프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