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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내가 바로 서야, 가족이 바로 선다.-에필로그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빠지다

by 방구석 관찰자

이상적 가족에 해당하는, 그러니까, 가족을 생각하면 몽글몽글 사랑이 피어나고, 세상을 떠난 가족만 생각하면 그리움에 눈물이 떨구어지는 분들은 이번 화를 건너뛰시라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다. 애초에 이 브런치북은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분들을 대상으로 쓰인 책이다. 소제목도 오죽하면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겠는가! 앞으로 기술할 내용은 가족이란 수레바퀴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분들을 위한 다소 험악하고 과격한 내용이므로, 굳이 끝까지 읽고 흥분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연대보증의 뜻을 먼저 살펴보자.

"보증인이 채무자와 연대하여 채무를 이행할 것을 약속하는 제도"이다. 이는 2010년대에 들어 점차적으로 없어졌으나, 기업 간 연대보증이나, 개인 간 연대보증은 아직 남아있다. 앞서 내가 거론한 연대보증은 개인 간 연대보증이다.


연대보증을 선 이후의 현실을 살펴보자.

자원을 빌려준 B는 느긋하게 상환기일만 기다린다. A가 성실하게 갚는 아주 극소수의 경우는 여기서 제외한다. 애초에 갚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은행 같은 기관에서 신용대출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짐을 나누고자 연대보증인을 줄줄이 엮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상환기일이 되어도 A가 나타나지 않으니, B는 연대보증인들을 찾아 나선다. 눈치 빠른 D, E 등등은 재산을 미리 정리했거나, 혹은 갚아줄 능력이 없는 상태이다. B는 가장 쉽게 돈을 뱉을 것 같은 C에게 채무 변제를 강요한다. 채권자는 연대보증인 중 아무나 한 사람 골라잡아서 전액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여러 명이 연대보증인이라고 해서 그 채무를 1/N 하는 것이 아니다.

C는 억울하다. A는 그나마 빌린 돈을 실컷 써버리고 잠적했다. C는 쓴 적도 없는 돈이다.


'연대보증'의 흐름을 감히, '가족'에 대입해 보겠다.

A는 노부모, 혹은 자녀다. C는 양쪽에 끼인 나 자신이다.


우리의 노부모 A는 자신들의 노후는 자식들이 책임질 거라고 믿어왔던 세대이다. 그들은 자녀들이 돈을 버는 사회인이 되면, 당연히 일정한 용돈과 생활비를 나에게 부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를 해결해 주길 원한다. 노부모 A는, 나와 한 몸이나 다름없는 내 자식이 나의 부족한 자원을 빌려주는 C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전화를 걸어도 받아주는 자식, 안 받아주는 자식이 따로 있다. 가장 쉽게 들어줄 것 같은 C에게 전화를 건다. C는 A의 연대보증 요구를 절대로 거부할 수 없다. 왜? 우리는 피로 맺어진 가족이니까!


우리의 자녀 A는 C의 기대 속에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성인이 되어 독립할 시기가 되자, 사회가 너무 많은 자원을 요구한다. A에게 있는 건 앞으로 성장할 미래뿐, 현실적으로 손에 쥔 것은 없다. A는 아직 부족한 자원을 자신에게 빌려주도록 C를 설득한다. C는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자녀 A가 대출을 상환할 거라는 기대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처럼 부모에게 그 빚을 상환하는 역할을 A에게 강요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C는 A의 연대보증 요구를 절대로 거부할 수 없다. 왜? 우리는 피로 맺어진 가족이니까!


C를 살펴보자. 주 채무자로 지목된 C의 잘못은 없을까? C는 무지했다. A가 연대보증을 권할 때, '가족'이란 이름하에 모든 병폐에 눈감았다. 부모님 A가 주신 달디 단 열매를 받아먹었고, 젊은 시절에는 멋대로 살아보기도 했다. 자녀를 낳아 키우다 보니, 부모님이 나를 키우실 때의 마음에 공감하며 효도를 다하고자 한다. 중년의 나이에도 어린 시절에 충족되지 못한 인정욕구가 강하게 지배하며, 그런 의미에서 A의 연대보증 요구는 지나칠 수 없다. 또한, 자녀 A에 대해서는 A가 상환능력이 높은 확률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기에 연대보증에 동의했다. 진짜 사랑은, 전문직을 가지라 외치며 자녀를 학원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성인이 되면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는 명제를 가르치면서 내 품에서 놓아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직을 향한 자녀의 기대를 꺾고 싶지 않은 것이 진짜 사랑이라 믿는다.


대한민국에서 '혈연'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은 많지 않다. '가족이니까'의 미명아래 우리는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다. 가족 구성원 모두를 동일시하는 이 피곤함은 나만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서로에게 잠깐,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져도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인정머리 없고, 냉정하고, 가족을 우습게 아는' 배신자로 여긴다. 족보와 끈끈한 혈연관계를 강요당하지 않고 조금은 캐주얼한 관계가 되면 어떨까? 나는 이 끈끈함이 지겹도록 싫고, 피곤하다.


이제, 나 자신과 가족을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문제를 들여다볼 반역적 용기가 생겼는가?


지난 회에서 다룬, 나의 자산과 부채에 대한 맵을 그려본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예상보다 가난하고 능력이 없다.

당신은 당신의 예상보다 많은 변수로 인해 근로를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의 당신의 예상보다 빨리 재정적, 신체적 파산을 할 수 있다.


너무 냉정한가? 지금까지 당신이 고민해 온 많은 문제의 원인은 당신이 냉정하지 못해 생긴 일이다. 자신의 능력치와 미래의 예상치를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가족들에게 분수에 넘치는 지원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생애주기상, 인간의 생명이 저물어가는 곡선이 점으로 진입했으며, 더 이상의 화끈한 부(富)도, 깜짝 놀랄만한 행운도 찾아올 확률이 거의 없다. 우리는 조용히 생을 정리해 가는 시기에 들어섰다. 안타깝게도, 당신의 전성기는 40대~50대 초에 끝났으며, 노화의 곡선에 오래도록 머무를 일만 남아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기 객관화' 혹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메타 인지'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성찰을 해 본 사람만이 가능하다.


나는 부족한 능력으로 무한정 내 부모와 내 자녀에게 붙잡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표현하라. 나는 더 이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찬바람을 맞고 거칠어져 가는 땅이라고. 나에게 요구해 봐야 내 능력이상의 것은 나올 수가 없다고. 그렇게 표현하면, 그들이 나를 버릴까?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가족에게 버림받는 것인가? 당신은 가족 없이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인가? 나에게서 더 이상 자원이 나오지 않음을 선언했을 때, 나를 버릴 가족이라면, 그는 과연 진정한 의미의 가족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만약, 가족이 내 절규를 이해하고, 그들 나름의 살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것이 최적의 결과다. 나는 그들을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


내 노부모를 위한 지원은 국가와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이 사는 주민센터에 가서 적극적으로 문의해라. 당신의 부모를 위한 복지혜택이 분명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복지혜택에 대해 무지하며, 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당당히 찾아가는 일에 소극적이다. 부실한 법망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자들의 반만 부지런하라. 그들은 자신들이 취할 이익을 위해 사방팔방을 쑤시고 다니는데, 당신은 그 노력의 반도 안 하면서 신세한탄을 했을 수 있다. 당신의 게으름과 무지를 탓하라.


내 자녀를 위한 지원은 나를 먼저 변화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회적 지위가 우월한 직업을 가져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경쟁사회라 하더라도, 세상 어딘가에는 우리의 자녀가 할 만한 일들이 있다. 그것이 비록 남들에게 천시받느냐, 존경받느냐는 한 끗 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 즉 돈이다. 시장에서 오가는 구겨진 지폐나, 환자를 치료하고 받는 빳빳한 지폐나 돈이라는 의미에서 아무 차이가 없다. 모든 노동은 신성하며, 노동에 대가 역시 평등한 가치를 지닌다. 내 생각을 바꿔야 자녀의 생각이 바뀌며, 우리는 서로를 위기에 빠트리지 않고, 각자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아직도 공부 빼고는 자녀와 대화할 일이 없다면, 반성하라. 당신의 자녀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이르면 당신을 원망할 수 있다.


[작가의 변]

지금까지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린다. 불찰이 있다면, 브런치 북의 최대 한도가 30회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마무리 부분이 황망하게 끝나버렸음을 사과드린다. 부족한 글, 구독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그동안 행복했음을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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