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끼인 세대(영어로는 샌드위치 세대)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다. 물론 이 용어는 각자의 나이대에 맞게 끼워 맞출 수 있지만(내가 바로 끼인 세대요, 하고 주장할 수도 있고), 여기서는 중년세대에 대해 짚어보고 있다.
지난 화에서 각자의 재정적, 시간적 자산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재설계를 해야 할 차례다. (보험에도 수시로 재설계가 있지 않은가? ) 모두가 알다시피, 들어오는 자원은 한정적이고 적기까지 하다. 나가야 할 자원은 끝이 없고, 나는 영원히 젊지 않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지혜로운 노인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 날씨나 농작물의 상황을 예측하고 그 마을 사람들은 정신적 지주의 말을 따르며 서로 협동해야 한다. 혼자만 튀는 자유로운 영혼은 위험을 불사하고 탐험을 해야 하는 수렵사회에나 적합하다. 누구나 비슷해야 하고, 마을에서 모난 행동을 해서는 협동에 방해가 된다. 노부모는 정성을 다해 모시고, 가정의 노동력인 자녀들은 독립(결혼) 전까지 끼고 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3대가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심하게 의존하는 현상이 생겼다.
주로 자식이 부모에게 행하는 범죄에 대해 "패륜"이란 단어를 아예 고정으로 붙이는 것만 봐도, 혈연관계의 가족에게 반항, 배척하는 행위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서양의 가족관계를 "정 없다"라고 얘기하며 "개인주의"라고 그럴듯한 용어로 포장한다. 영화에서 흔히 보듯, 서양에서는 자녀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아르바이트로 자기 용돈을 충당하며,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한다. 독립을 한 자녀는 자기가 원하는 동거 형태를 누리다가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기도 한다.
"하이, 대디!"
"하이, 아들!"
"대디,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엄마가 천국에 간 이후 나는 앨리사와 만나고 있단다. 너는 요즘 어떠니?"
"저는 앤과 같이 살고 있어요. "
"그래? 늘 행복하게 살아라, 언제나 아들, 너를 사랑한단다."
"네, 아버지도 잘 지내세요. 아버지, 사랑해요."
우리나라 정서상 힘든 조금은 무심한 분위기의 대화가 흔하다. (물론, 전세게적인 경제침체로 젊은이들이 다시 부모에게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그럼, 이들의 대화는 우리의 시선에서 못마땅할 뿐 아니라, 잘못되었다고 외칠 수 있는가? 자, 여러분은 과연 가족들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루에 몇 번 하는가 세어보자. 아니, 1년에 몇 번 하는지 세어보자.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을 표현하는 서양(비록 형식적이라 할지라도)에 비해 우리 문화가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요점은, 우리는 가족 간에 너무 깊게 관여되어 있고, 가족과의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독립을 한 이후는 사회의 한 개인으로 대우해야 함에도, 우리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으며 한 몸뚱이처럼 행동하고 느낀다. 노부모, 나, 자녀, 모두 각각 독립된 개체들이다. 지금까지, 가족이란 대의에 깊게 매몰되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이제라도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인생은 무엇인가? 이 말은, 노부모를 버리고, 자녀를 외면하란 얘기가 아니다. 그들의 일을 나 자신의 일처럼 똑같이 생각해서 자신이 가진 자원 대비 지나친 에너지를 낭비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혹자는, 지금도 떠올리면 눈물이 나는 노부모를 멀리 하는 패륜을 저지르란 말인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노부모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감정이 눈물을 흘리게 한다면, 그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자원을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최선의 상황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자원과 에너지가 적은데, 그것을 초과해서 요구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면, '나를 무시하지 말고, 우선시해라'라는 뜻이다.
가족일지라도,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보고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 머리를 차갑게 하는 것이, 노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아래 깔린 나를 꺼낼 수 있는 시작점이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자원을 받아 언제나 부모를 그리워하는, 축복받은 분들은 논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