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 하루 종일 흙 묻은 손으로 삽질을 하고,
굳은살이 잡힌 손을 바라보다
저녁 식판을 비우고,
습기 찬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을 때면
나는 종종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을 뻔한다.
몸은 녹초가 되어 매트리스 위에 눕지만,
머리는 오히려 더 깨어 있다.
등 아래 모포는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은 어디까지나
몸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은 계속해서
내 안쪽 어딘가를 헤맸다.
그날 밤도 그랬다.
생활관은 조용했고,
모포에 파묻힌 동료들은
숨소리만 남긴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아무런 예고 없이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엔 색도 흐릿했고,
무슨 기억인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조명 아래 옅은 라일락빛,
네온이 번지는 바닷가,
조용한 미소.
그리고 대관람차 안에서 마주 본 눈빛.
그녀였다.
아주 선명하게.
아주 고요하게.
어느 기억보다 더 또렷하게.
라일락빛 스웨터가
봄밤 공기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을 따라
나도 웃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우린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그때.
나는 그 기억을 본다기보다
그 순간의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녀의 표정 하나, 숨소리 하나가
잊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진해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꿈도 아닌,
깨어 있는 이 시간 속에서
이렇게 불쑥 스며든 건.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냥 떠오른 얼굴이 아니라,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었던 마음이라는 걸.
눈을 떴다.
여전히 천장이었고,
어둠은 고요했고,
그녀는 없었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분명,
그날 이후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