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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 라일락 꽃 필 무렵

by 빡빈킹

도쿄의 봄은 여전히 바빴고,
전철은 여전히 혼잡했고,
거리의 간판도, 바람의 방향도
그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 도시를 걷는 내 마음뿐이었다.


나는 특별한 목적 없이 걸었다.
몇 년 전
그녀와 함께 지나갔던 골목을 따라 걷고,
잠시 멈춰 서서
당시엔 그냥 지나쳤던 벤치에 앉아보았다.

그녀가 그때 뭔가 말하려다 멈췄던 그 자리에
나는 말없이 앉아
오래도록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그녀와 함께한 계절은
마치 잘 접힌 편지처럼
내 안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다이바에도 다녀왔다.
대관람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햇살은 그날처럼
유리창을 조용히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탑승권을 사지는 않았다.
올라가서 혼자 그 풍경을 보는 게
왠지 지금의 기억을 건드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멀리서
그 커다란 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일락이 피기 시작한 날
그녀와 처음 만났던 교정 근처 벤치에 다시 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용히 흔들리는 보라빛 꽃들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상상이 스쳐갔다.

나는 가방을 열고
그날 찍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우리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
웃고 있었는지,
눈을 피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진.

그걸 무릎 위에 조용히 놓고,
나는 그냥,
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이 도시 어딘가를
나보다 먼저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그때의 나처럼
말하지 못한 편지 하나쯤을
가방 어딘가에 넣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오후,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깐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람들 사이에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섰지만
그 뒷모습은 멀어졌고
사라졌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시,
조금 천천히.

그 봄,
라일락 꽃이
참 예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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