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누구냐, 넌?”

생생하게 그려라_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박찬욱 감독의 2003년 영화 ‘올드 보이’. 최민식이 연기한 주인공 한대수는 영문도 모른 채 지하감옥 같은 음습한 독방에 갇혀 무려 15년을 보낸다. 매일 배달돼 오는 중국집 군만두를 잘근잘근 씹으며. 한대수는 자신을 가둔, 누군지 모르는 상대를 향한 독기를 품고 혼자 싸움 연습에 몰두한다. 이른바 상상훈련. 빈 벽에다 대고 주먹을 치는 것이다. 가상의 적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그렇게 군만두 삼켜가며 홀로 익힌 싸움 기술이 실전에 통할까? 철옹성 같던 감방에서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한대수는 길거리에서 건달 서넛과 마주친다. 무리 중 한 명한테 담배를 빼앗아 피다가 호된 발길질을 당해 나동그라졌다가 다시 일어서면서 하는 말. “십 년 동안의 상상훈련, 과연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 하고는 건달 셋을 가볍게 때려눕힌다. 그러고는 “있다”라고 나직이 외친다.



젊은 시절 그야말로 무술가의 몸놀림을 선보였던 배우 이연걸이 주인공 무명(無名)으로 나온 2003년 영화 ‘영웅: 천하의 시작’. 무협영화 마니아로서 나는 영화 도입부가 보여준 그 미학적 완성도는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평가한다. 마치 한대수처럼 십 년을 홀로 수련한 끝에 자기만의 검을 만든 고수 무명. 아, 초절정 고수임에도 이름조차 없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무명. 그가 빗속에서 늙은 맹인 악사가 비파를 타는 가운데 창의 고수 장천과 맞서 싸우는 장면. ‘무공과 음악은 그 원리가 같다’며 비파 소리에 묻혀 절정 고수 둘이 오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가상 대결을 벌였던 그 유명한 장면. 은빛 검과 창이 난무한 그 상상 속의 대결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임에 틀림없다.


어떤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움직임. 그렇게 수련하고, 적과 대결을 벌인다?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현실성 뚝 떨어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스포츠 세계에서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일반화된 지 오래다. 대단한 성취를 이룬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전문 트레이너까지 두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수영 황제로 불린 마이클 펠프스는 호흡과 세세한 몸 움직임 하나하나는 물론 물의 파동까지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상상하며 경기를 준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최악의 상황까지 머릿속으로 대비하며 준비했다고 한다. 실제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0m 접영 경기에서 고글에 물이 들어오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침착하게 경기에 임해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 역도의 전설 장미란은 벽을 마주 보고 상상 훈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다가올 대회날을 미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훈련에 임했다고 한다.


골프? 우리가 흔히 멘털 스포츠라고 부르는 만큼 더 할 말이 없겠다. 타이거 우즈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골프 황제로 만들어준 아버지 얼 우즈로부터 심리적 훈련과 이미지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는 골프 기술을 시각화했고, 다가올 게임을 상상으로 먼저 치러보는 심리적 리허설도 했다. 그렇게 게임의 중압감과 두려움을 떨쳐 냈다. 특히 샷을 하기 전 볼의 비구선과 랜딩 지점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은 물론, 퍼팅에 앞서서도 골프볼이 라인을 따라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 훈련을 했다.


우리 주말골퍼들은 어떤가. 그런 건 그냥 일류 프로선수들이나 하는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왜 우즈나 로이 맥길로이 스윙 영상을 그렇게도 열심히 보는가? 물론 멋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따라 하고 싶다는 욕구로 그들의 스윙을 나름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바로 그게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일류 선수들의 스윙폼을 머릿속으로 따라 하기. 예를 들어 그 어렵다는 트랜지션 동작을 따라 하기 위해 우리는 프로들의 다리와 허리, 상체 움직임을 낱낱이 분석해 나한테 적합한 스윙이 컨벤셔널 스윙인지 최근 한참 유행했던 몸통스윙(GG)인지를 결정하고, 그 스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지 않는 골퍼와 하는 골퍼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날까? 만약 10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두 골퍼의 성취도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있을 거라고 누구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비 오는 날 지하철 플랫폼에서 우산을 열심히 휘두르는 사람, 그 주말골퍼가 결국 위너가 될 것이다.^^)


일도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나모리 가즈오는 저서 ‘일심일언’에서 스스로를 ‘꿈을 꾸는 사람’으로 칭했다. 끊임없이 ‘꿈의 시뮬레이션’을 펼쳐보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 강한 바람같이 되었고, 계속 껴안고 있는 그를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언제부터는 그저 가만히 쉬고 있을 때에도 그 바람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뚜렷한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목표를 꼭 달성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인드로 일한다. 머릿속으로 꿈꾸고 바라는 만큼 더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성취와 성공은 대부분 그렇게 이뤄지는 게 보통이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 ‘올드 보이’의 오대수는 자신을 15년 동안 가둔 그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직한 목소리로 “누구냐, 너?”라고 읊조린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오대수가 오대수 스스로한테 던지는 질문으로 들렸다. 오랜 감금 생활로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아를 잃어버린 오대수의 독백인 것처럼. 나를 찾는 자기 성찰에도 이미지 트레이닝은 유효하다. 외부의 모든 감각적 자극을 모두 끊고 자기 몰입에 들어가는 내적 관찰은 이미지 트레이닝의 한 방법이다. 우리 현대인은 갈수록 고독하고 공허하고 불안한 삶을 산다고 스스로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책 ‘삶의 지혜에 대한 아포리즘’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 끊임없이 의존하는 사람은, 고독 속에서 자신의 4분의 3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바삐 살다가도 가끔은 문득 ‘나는 누구인가’ 궁금해지는 것은 나뿐인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고독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고독해지자. 자기 성찰로 내면의 풍요로움을 찾아 떠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그것이 우리 스스로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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