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전에 예감_무림고수 K
“컴온(Comm on)”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는 테니스 코트에서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플레이로 유명했다. 아주 가끔, 그러니까 5세트 시합을 하면 승부처에서 많아야 한 두 번 “컴온”을 외치는 게 전부였다. 그것은 스. 타. 카. 토로 아주 짧고 간결했다. 상대를 압박하려는 의도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봐, 잘하고 있잖아, 힘내자”는 다짐으로 나는 들었다. 페더러 광팬인 나는 그의 ‘컴온’도 사랑했다. 하여서 나도 “컴온”을 외치는 사람이 됐다. 컴온은 나 스스로한테 주는 자기 확신이다. 안타깝게도 그 대척점엔 자기부정이랄까 실망이랄까 그 몹쓸 ‘오 마이~(Oh my)’가 있다.
골프는 아마도 가장 감각적인 스포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골프 샷은 아주 민감한 것이어서 투어 프로들조차 100번 스윙을 해도 100% 같은 느낌의 스윙을 만들어 내기는 힘들 거라고 말할 정도다. 프로의 세계에서도, 하루 18홀 플레이를 하면 샷 감이 좋았다가 나빠지거나, 반대로 나빴다가 좋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감각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로 보는 게 맞는다. 전설적 골퍼 벤 호건이 “하루만 연습하지 않아도 스스로 안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루라도 연습을 게을리하면 골프 스윙의 ‘감(感)’이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나는 MBTI가 INTJ다. 다른 지표들은 잘 몰라도 첫 번째 분류 지표, 즉 내향성(Introversion)이냐 외향성(Extraversion)이냐는 골프 플레이에도 영향을 주는 듯하다. 내가 만난, 로우 싱글을 치는 주말골퍼 중에 I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았던 거 같다. I 성향이 E 성향보다 골프에 다소 유리한 특질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I는 자신의 내면에 더 주의를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 외부 세계에 관심의 초점을 두기보다 조용한 가운데서 자기와의 대화를 즐긴다. 감의 영역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아무래도 유리할 거다. 타이거 우즈는 어렸을 적 매우 내향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자서전에서 적고 있다.
‘골프의 감각’ 영역으로 나아가 보자.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골프 셋업 동작에서 헤드 페이스를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백스윙과 다운스윙 궤도가 달라질 수 있다. 옆에서 프로가 헤드 페이스가 “열렸다” 혹은 “닫혔다”고 이야기해 줄 수는 있으나, 그것을 최종 판단해 페이스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골퍼 자신의 감각이다. 백스윙 톱에서의 헤드 모양에 따라 다운스윙 궤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만약 백스윙 톱 모양이 잘못됐다면 우리는 다운스윙 과정에서 골프볼을 정확히 맞추기 위한 보상 동작을 ‘감각적’으로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몸의 감각이 알아채 부지불식간에 반응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골프는 초감각의 영역에 있는 스포츠여서 자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요한다.
골프에서 말하는 ‘피드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골프볼을 임팩트 한 직후의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머슬백 아이언을 애호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피드백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머슬백은 캐비티백에 비해서 헤드 스위트 스폿이 작지만 정타가 날 경우 이른바 ‘손맛’이 매우 좋다. 이런 피드백은 연습에서도 매우 귀중한 경험의 축적을 가져온다. 정타를 맞추는 연습을 하면서 스윙 자체가 좋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초심자들이 머슬백으로 연습하면 더 빠르게 스윙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연습장에서는 꽤 자주, 그리고 필드에서도 가끔씩 ‘컴온’을 외친다. 환상적인 볼 스트라이킹을 기념하는 자찬의 말이다. “그것 봐, 넌 잘 해내고 있어”라는…… 컴온을 외치고 나면 그 뒤로 공이 쭉쭉 뻗어 나가서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다. 반면 ‘오 마이~’를 외치는 경우도 있다. 오 마이는 보통 스타카토보다는 늘어지는 탄식조가 되기 마련인데, 그 장탄식에 맞춰 볼은 아웃오브바운드(OB) 라인을 벗어나거나 변변치 않은 궤적을 그린 끝에 러프나 벙커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골퍼들은 골프볼이 맞는 순간 그것이 좋은 임팩트인지 나쁜 임팩트인지를 직감한다. 그리고 그 직감은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
필드에 나가보면 흔히 듣게 되는 주말골퍼들의 이야기가 있다. “아! 오늘은 A스윙이 잘 안 되네. 지금부터는 B스윙으로 쳐야겠어”. 내가 아는 한 아마추어 골퍼는 “나는 대여섯 가지의 스윙을 구사할 수 있다”고까지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날의 감의 변화에 따라 스윙을 아예 바꿔서 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프로골퍼의 경우는 어떤가? 게임이 잘 안 풀릴 경우 그립, 어드레스, 백스윙 등 이른바 ‘기본’이 평소와 다르지 않나 체크하는 경우는 있어도 A, B, C 스윙을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가 비상용으로 꺼내 쓰는 행동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프로는 이미 자기만의 스윙을 만들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해범(海帆) 김광석 선생님이 나에게 십팔기를 가르치면서 옛 무언(武諺)이라고 강조한 말이 있다. “천 개의 초식을 펼 수 있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한 개의 초식이 숙련됐음을 두려워하라(不怕千招會, 就怕一招熟)” (초식은 짧은 연속 동작의 한 묶음을 뜻한다.) 널리 천 초를 배워 기초를 쌓은 뒤에는 단 몇 초 만을 숙련(熟練)하는데 지극히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곧 기예(技藝)의 묘(妙)는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숙련됨에 있다고 강조한 말이다. 골프는 어떤가? 스윙 역시 단 1개의 초식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숙달이 어디 쉬운가?
나와 같은 INTJ인 J는 세 달간의 골프연습 끝에 손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스스로 몸치임을 자부(?)하는 J조차도 벌써 임팩트 피드백을 느끼고 I 특유의 감각과 암시와 사유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눈치다. 그러나 골프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몇 년 열심히 연습했다고 누구나 싱글 골퍼가 될 수 있다면, 주말골퍼 상당수가 아마도 골프에 흥미를 잃고 클럽을 놓을 수도 있겠다. 될 듯 말 듯 애간장을 끊임없이 녹여서 감각을 계속해 벼리게 만드는 스포츠가 바로 골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