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계 스윙, 프레드 커플스

폼생폼사 인생_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2015년에 초판이 나온 김용택 시인의 책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는 이른바 감성치유 라이팅 북(Wrighting Book)을 표방했다. 시인이 숙고해 선별한 동서고금의 아름다운 시들을 독자가 필사하다보면 “시가, 밤하늘 별들 사이를 헤매며 사는 우리 마음을 잡아줄지도 모른다”는 매우 합당한 이유를 들면서……내가 좋아하는 신경림 시인의 ‘갈대’도 이 책에 들어 있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로 시작해, 어느 밤 갈대가 자기 온몸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제 울음 때문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고 마무리되는 빼어난 시다.


책 오른쪽 페이지는 여백으로 남겨둬서 왼쪽 페이지의 시를 옮겨 적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나는 필사를 하는 대신 ‘갈대2’를 썼다. (고쳐 쓰고 싶은 맘 굴뚝같으나 당시의 감흥으로 적었던 대로 옮긴다.)


우는 것이 갈대뿐이랴./소리 없는 강물이 서러운 바람이/칠흑 창공에 희뿌염 내걸린 달이/숨죽여 숨죽여 뿌리박은 대지와 같이 운다./

갈대는/저 혼자만의 울음이 아닌 것을,/흔들리는 것이 세상을 사는 것임을/흔들리다 꺾이기 전에는/조용히 알고야 말 것이다./


음, 마치 조지훈이 “나그네 긴소매 꽃잎에 젖어”라고 읊은 ‘완화삼’에 화답해 박목월이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배경 삼아 떠도는 ‘나그네’를 쓴 것처럼, 신경림의 ‘갈대’에 화답해 내가, 바로 내가 버젓이 ‘갈대2’를 쓴 것이다. 신경림 시인에 필적하는 대시인이라도 된 것인 양 그랬다.



나는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신문사 선배들과 책에서 문장을 배워 문장의 맛을 조금이라도 알고 난 뒤로는 무슨 강박처럼 좋은 문장에 탐닉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다. 전∙현직 기자들 가운데 문학작가만큼이나 완벽한 문장에 집착하는 이들이 많다. 이태준 ‘문장강화’, 쇼펜하우어 ‘문장론’, 이오덕 ‘우리말 우리글’ 등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노스탤지어처럼 다가온 문장들이 내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읽고 배웠던 시와 수필과 소설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피천득의 ‘인연’, 김유정의 ‘동백꽃’,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글을 쓰겠노라 벼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글들은 작가가 춘천 출신이거나 배경이 강원도여서 춘천에서 나고 자란 나를 그렇게나 끌어당겼을 수도 있겠다. 시적 운율과 서정으로 찬연히 빛나는 이 미문들. 나도 언젠가는 명문을 쓰리라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대가(大家)에 대한 존경은 필연적으로 모방을 낳는다. 멋짐을 따라 나도 멋진 척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런 폼생폼사라면 나쁠 게 없다. 나도 스스로를 의도적 폼생폼사 부류로 분류한다. 폼(Form)은 방식이자 형식이다. 그런 형식은 실질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직장인인 내가 매일 아침 출근해 책상에 앉자마자 리추얼처럼 하는 일이 있다. 필기구 케이스를 열어서 잉크 색깔과 펜촉 굵기가 각기 다른 몽블랑 만년필 세 자루를 올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신문 뭉치와 책상 위아래에 둔 10여 권의 책을 제 자리에 정돈한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한 잔 뽑아 책상으로 돌아온다. 출근 시간은 보통 7시. 앞으로 두 시간가량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준비를 끝낸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보면 이것도 폼생폼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나한테는 다르다. 신문과 책을 볼 때는 모나미 플러스펜으로 줄을 죽죽 긋거나 동그라미를 치면서 읽는데,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거나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할 때는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한다. 만년필 펜촉이 종이를 긁는 그 독특한 필감이 나의 뇌를 자극하고 일깨운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신문과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만년필로 필사하는 버릇이 여지없이 작동한다.


폼생폼사 골프의 세계로 가 보자. 프레드 커플스. 1959년생, 1980년 PGA 입회, 1992년 메이저 마스터스 우승, 2012년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헌액. 골프 역사상 가장 ‘뷰티풀’한 스윙 폼을 꼽으라면, 나의 엄지 척은 단연코 커플스의 것이다. 아, 그의 스윙은 프로의 세계를 넘어 정녕 신계(神界)의 그것이다. 장갑도 안 낀 손으로 무심한 듯 헤드 무게로만 던져내는 부드러운 채찍 스윙. 그 스윙을 보자면 하루 종일 골프볼을 때려도 결코 지치지 않을 거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비거리는 놀랍도록 대단하다.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PGA 골퍼로 타이거 우즈와 커플스가 항상 꼽히는데, 1975년생 우즈가 16살이 많은 커플스와 연습라운드를 돌고 나서 “커플스가 나보다 멀리 친다”고 말한 일화가 전해진다. 커플스는 볼 스트라이킹을 할 때 손과 팔, 어깨 등 상체에는 정말로 힘이 완전히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팩트 직후에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 그립을 아예 놓아 버리는 특유의 동작도 아주 유명하다. 그의 아름다운 스윙 폼과 비거리는 아마도 연관이 있을 게다.


스포츠는 폼이다. 나의 지론이다. 폼이 결국 기본기이기 때문이다. 폼이 나쁘면서도 성적을 낼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은 별로 없을 듯하다. 골프도 마찬가지다. 스윙이 좋아야 그 위에 힘을 실어 공을 때릴 수 있다. 아마추어 골퍼 중에서 비거리가 대단한 이들은 대부분 폼이 좋다. 자기가 가진 힘 전부를 사용해 공을 때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 스윙 폼이다. 그런데 근력으로만 치는 스윙으로는 최대 비거리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스윙이 잡히지 않았다면 아무리 근력이 좋아도 드라이버를 캐리 250미터씩 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근력이 대단치 않더라도 스윙만 정석대로 갖췄다면, 아마추어 골퍼도 250미터를 쳐내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십 수년간 골프를 해 오면서 타수보다는 스윙에 집착했다. 골프도 폼생폼사로 쳤다. 커플스는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스윙, 거기에 완벽하게 힘을 실어 때려내는 자기만의 스윙을 만들었다. 고백 건대 나는 최근에도 로리 맥길로이를 깨끗이 잊고 커플스 스윙으로 돌아가볼까 하는 유혹을 받곤 한다. 아, 주말골퍼의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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