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관찰한다_무림고수 K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Du musst das Leben nicht verstehen)”.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청년기에 지은 시 제목이자 그 시 첫 소절이다. 릴케는 이 시에서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이라며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가라”고 노래한다. 다음 구절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고대 로마의 시인 퀸투스 호라티우스도 일찍이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quam minimum credula postero)”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1990년에 개봉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키팅 선생은 공부와 삶의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 소년들이여! 너희들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고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사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숙명적으로 다가올 죽음을 기억해 우리는 마땅히 오늘의 행복부터 찾아야 한다.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이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골프를 친 그 숱한 축제 같은 나날들을, 나는 기억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볕 따뜻했던 봄날도, 녹색 잔디 위로 폭우가 쏟아지다 무지개가 솟았던 여름날도, 시인 서정주가 읊은 대로 초록이 지쳐 든 단풍과 짙푸른 하늘이 빛깔 곱게 어우러진 가을날도, 첫눈이 내 마음과 같이 폴폴 날려서 그늘집에 조용히 앉아 따끈한 정종을 마셨던 겨울날도, 그 모든 날이 추억으로 남았다. 내가 골프를 친 그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주말골퍼들이 이 아름답고 행복한 날들을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 자기만의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이다. 비즈니스 골프 자리가 아니라면 나는 동반자들과 함께 티샷 동영상을 촬영하곤 한다. 오래된 라운드 루틴이기도 하다. 보통 골프 라운드를 나가면 시그니처 홀에서 스틸샷을 찍곤 하는데, 그것도 좋지만 영상으로도 남겨 보길 권한다. 차곡차곡 동영상이 쌓이다 보면 나만의 골프 아카이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상에는 내 아름답던 추억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리고 하나 더, 내 골프 스윙이 남는다. 골퍼는 필연적으로 자기의 스윙을 관찰해 다듬고 발전시켜야 한다. 자기 스윙을 돌아보지 않는 골퍼가 내일은 더 나은 골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시험공부를 안 하고 100점 맞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나는 10여 년치 골프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곧 나의 골프 스윙 변천사다. 내 스윙이 어떻게 변화발전해 왔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아주 오래된 스윙은 지금 보면 조금 창피해 숨기고 싶긴 하다. 그래도 그때 내가 어떻게 스윙하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 좀 더 나은 스윙을 갖게 된 거라고 자족한다.
백스윙 톱에서 머문 시간이 유독 길었던 때는 헤드가 중력의 힘만으로 떨어져 내리도록 연습하던 때다. 백스윙을 가파르게 들어 올렸다가 어깨 뒤쪽으로 헤드를 크게 넘기는 트랜지션을 했을 때는 회초리 스윙을 만들려고 노력하던 때다. 드라이버 스윙을 할 때 임팩트 때까지 오른발 발바닥을 최대한 땅에 붙여서 체중을 뒤에 남겨 놓고 볼 스트라이킹을 하려고 노력했던 스윙도 보인다. 한 때는 백스윙과 다운스윙 궤도가 일치하는 원 플레인 스윙을 했고, 또 언제부턴가는 궤도가 다른 투 플레인 스윙을 했다.
간혹 올해의 스윙보다 지난해의 스윙이 좋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골프스윙이 2~3년의 간격을 두고 한 단계씩 추세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거다. 1년 전 스윙이 괜찮아 보일 수는 있어도 5년 전 스윙이 지금 스윙보다 좋아 보이는 일은 없다. 동영상을 찍는 습관을 들이면 내가 어떻게 스윙하는지 알 수 있고, 그래서 스윙을 더 쉽게 고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실내 골프연습장보다는 야외연습장인 인도어를 더 선호했다. 골퍼들 사이에 “날아가는 골프볼이 곧 나의 스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기 골프 스윙에 따라 볼의 궤적과 탄도, 거리, 구질이 달라지는 걸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 나는 실내 골프연습장에 다닌다. 매 샷마다 내 스윙 동영상을 연습장 기기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드 스피드와 클럽 패스, 임팩트 시 페이스 모양, 볼의 구질까지 찍혀 나온다. 골프 연습하기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동영상은 저장할 수도 있어서 연습장을 다녀온 날에는 항상 스윙을 반추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립, 어드레스, 테이크 어웨이, 백스윙, 트랜지션, 임팩트, 팔로우 스루, 피니시까지 꼼꼼히 관찰한다. 이것이 골프 스윙을 교정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스윙을 눈으로 확인하는 행위 그 자체가 대단히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 번은 실내 골프연습장 타석에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데 한 중년 부부가 머뭇머뭇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스윙이 너무 좋아서 동영상을 촬영해 따라 해보고 싶다. 그래도 되겠느냐”라고 묻는 것이다. 다소 민망했으나 “그러시라”라고 답한 적이 있다. 나 역시도 스윙이 좋은 골퍼를 만나면 그의 스윙을 카피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주말골퍼들은 골프 라운드를 나가도 스윙 동영상을 찍는 일이 많지 않다. “창피하다”거나 “대단하지도 않은 스윙 찍어서 뭣하게”라고 머리를 긁게 되는 것이다.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골프가 화두에 오르면, 상대가 골프 잘 치는 법을 내게 묻는 일이 있다. 장타 비결이나 스윙 메커니즘 등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때 나는 상대가 혹시 스윙 동영상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스윙 동영상을 보면서 아직 스윙이 잡히지 않아 오버 더 톱을 하는지, 거리 욕심에 지나친 오버 스윙을 하는지, 손목과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 지, 스윙 자체는 좋은데 공을 때리는 연습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스윙 교정보다 코어근육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 아닌지 상대와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영상 찍어둔 게 없는데요”라는 안타까운 답변이 많다. 스윙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지한 고민이 없으면 스윙은 나아지기보다 제자리걸음을 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봐야 한다.
나는 라운드를 다녀오면 스윙 동영상을 편집한다. 스윙 앞뒤로 필요 없이 길게 찍힌 부분을 잘라내기도 하는데, 동반자들의 모습과 목소리는 그대로 남기려 한다. “굿샷! 와~ 벙커 넘어갔어!” 같은 지인들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나를 들뜨게 만드니까.
아, 그러고 보니 나한테는 유독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굿샷~' 산 메아리까지 만들어 내는 형님이 있다. 평소 출중한 능력으로 후배를 이끄는데, 주말 사적인 모임까지 후배를 아끼고 챙기는 선배라니. 그런 목소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