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움베르트 에코, 브루넬로, 귀추법, 가추법, 이름
대부분의 문학 작품의 첫 문장이 중요한 것처럼,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경우 “첫 추리”를 통해 전체 작품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의 첫 추리는 “주인공 윌리엄 수사가 본 적도 없는 수도원에서 도망친 말의 이름 ‘브루넬로’를 귀추법을 통해 알아맞히는 것”이다(1일 1시과, 이하 “브루넬로 추리”라 함).
따라서 브루넬로 추리를 풀면 『장미의 이름』 추리의 절반은 풀린다. 즉, 에코의 메타 귀추법(메추)을 사용하여, 나는 “‘브루넬로 추리’를 푸는 것이 『장미의 이름』을 해석하는 핵심”이라는 프레임을 선택했다.
지금부터 이 ‘첫 추리’의 의미를 에코의 창조적 귀추법, 나의 범추법을 통해 샅샅이 파헤친다. 범추법은 나만의 고유한 추리방법론으로 이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설명할 예정이다.
<장미의 이름을 읽거나 보지 않은 분을 위한 첫 추리의 간단 요약>
수도원에 도착한 윌리엄은 수도사가 잃어버렸다고 말한 말에 대해 탐문하고, 마구간 주변의 흔적과 수도사들의 발언을 통해 실종된 말이 작은 흑갈색 말임을 알아차린다. 윌리엄은 말의 외형과 성격, 그리고 수도원 내의 언어 습관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끝에, 중세 철학자 장 부리당이 자신의 말에게 붙였다고 알려진 이름, ‘브루넬로(Brunello)’를 수도승들도 유사한 맥락에서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리고는 추리 끝에, 그 말의 이름이 바로 브루넬로였다고 정확히 맞혀내며 아드소를 놀라게 한다.
어떻게 윌리엄 수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도원의 도망친 말 이름이 '브루넬로'임을 알았을까? 이 추리를 풀기 위해 나는 이탈리아 와인에 대한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브루넬로와 나의 첫 만남은 와인이었다. 지금은 끊었지만 한때 와인, 그중에서도 가성비가 뛰어나면서도 다양한 이탈리아 와인에 심취했었다.
당시 와인 테이스팅을 비롯해서 공부도 많이 했었고, 업자들도 많이 만나봤고, 엘리트 중년 남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해 와인 관련 사업을 하는 것도 잠깐 생각도 해봤고, 한국 미술가를 섭외하고, 가성비는 뛰어나지만 레이블이 뒤떨어진 이탈리아 와이너리를 찾아 와인 레이블링 사업을 하는 것도 구상했었다(이건 와이너리도 선정하고, 실제 미술가 섭외까지 마쳤었지만 아쉽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각설하고, 이탈리아 와인 중에 “Brunello di Montalcino” 흔히 BDM이라고 하는 유명한 와인 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몬탈치노(Montalcino)라는 작은 마을에서 생산되는 브루넬로라는 뜻인데, 산지오베제 그로쏘(Sangiovese Grosso) 포도 100%로 생산된다. 프랑스의 피노누아(Pinot noir)와 종종 비교된다.
BDM을 이루는 포도품종인 산지오베제(특히 산지오베제 그로쏘)는 다른 포도 품종에 비해서 껍질이 두껍고 색소(안토시아닌)가 풍부해서 짙은 검붉은 색을 띤다. 이러한 포도껍질의 어두운 색과 깊은 맛 때문에 지역 농부들이 관습적으로 산지오베제를 ‘Brunello’라 불렀고, 19세기말까지는 이게 포도 품종의 이름처럼 쓰이다가, 이후에는 와인 이름(Brunello di Montalcino)으로 정착한다.
* ‘Bruno’는 이탈리아어로 ‘갈색’ 또는 ‘짙은 색’을 뜻하고, 축소형 어미 “-ello”가 붙어서 “Brunello”는 ‘갈색 혹은 짙은 색 열매’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산지오베제를 브루넬로라고 부른 것은 ‘어둡고 짙은 색’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아래 포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갈색’과는 거리가 멀다.
피노누아 역시 ‘pinot’는 소나무를 말하고, ‘noir’는 검은색을 말하는데 솔방울처럼 검은 포도 열매가 알이 작고 송골송골 맺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검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피노누아보다 산지오베제-브루넬로가 더 검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붉은색이다. 그르나슈-피노누아-산지오베제를 비교하면 눈에 확 들어온다.
따라서 우리는 브루넬로를 갈색으로 번역하지만 지역 농부들에게는 사실상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검둥이’였고, 그래서 검은 산지오베제를 ‘검둥이-브루넬로’로 불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즉, 산지오베제를 ‘브루넬로’라고 불렀던 이유는 다른 포도품종에 비해 산지오베제가 '비교적 어둡고 짙은 색’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우리가 이름 지을 때 ‘다른 것과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뽑는다는 점을 상상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처음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 때 브루넬로를 보고 BDM이 떠오르며 상당히 반가웠다.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 윌리엄 수사의 꼬붕 아드소가 윌리엄에게 첫 번째 추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끝까지 이해 못 한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어떻게” 윌리엄은 수도원이 잃어버린 말(馬)의 이름이 ‘브루넬로’인지 알아맞혔냐는 부분이다.
윌리엄은 다른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것은 다음 화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아드소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간다.
나는 BDM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브루넬로를 산지오베제 품종에 연결시켰고, 그럼 ‘브루넬로’의 정확한 번역은 ‘검둥이’라고 추정했고, 우리가 누런색 개를 “누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은 동종의 열매, 동물에 비해 “더 어둡고 짙은 색 계열의 열매, 동물”을 ‘브루넬로’라고 부르겠구나라는 가설을 자연스럽게 세우며 귀추법으로 이 부분을 추리했다.
아래 이탈리아 토종 품종과 다른 말 품종을 비교하면 이 어두운 느낌을 알 수 있다. 즉, 대부분의 말이 갈색이니 갈색말을 브루넬로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다른 갈색말들보다 현저하게 더 어두운 색의 말을 ‘브루넬로-검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참고로 나는 말띠인데, 저 사진을 찍을 때 말이 유난히 나를 빤히 쳐다봤었다. 좀 거리가 있어서 사진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데, 늘씬한 몸매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있었고, 고고하게 퍼지는 아우라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아, 이래서 옛사람들이 명마에 미치는구나를 잠깐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윌리엄은 도망친 말의 흔적으로 '검은 털 오라기'를 발견한다. 만약 '브루넬로'를 단순히 '갈색'으로 해석한다면 이 추리는 맞지 않지만, '검둥이'로 해석하면 완벽히 들어맞는다(참고로 이윤기 선생은 블랙베리를 안 드셔보셔서 블랙베리는 ‘검은 딸기나무’로 번역하신 것 같다 ㅎㅎ).
이런 가설은 ‘이름’에 대한 중세 유럽 사람들의 ‘성의 없음’에 의해 더 튼튼해진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면 중세 유럽인들은 이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성의'했다. 내가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 영국 계열사 임원 중에 Steven Smith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잠깐 ‘차(tea)’에 심취했었을 때 Steven Smith라는 차 브랜드를 좋아했었는데,
Steven Smith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같이 줌 회의를 했었다. 당시 최근에 구입한 Steven Smith차를 보여주면서 농담으로 “야, 너 돈 많이 벌어서 인제 차사업도 하니”라고 물었는데, 그 친구가 농을 받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런던 와봐, 1/3은 이름이 Steven이고,
1/3은 성이 Smith야.”
단적으로 얼마나 유럽에는 같은 이름, 같은 성이 많은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그런데 정말 유럽 사람들 보면 이름은 몇 개 안 된다. 기독교 영향으로 중세 이후 세례명을 통해 이름이 보편화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대부분의 이름이 성경의 인물들과 성인들이다.
성(姓)은 중세 사회 구조와 직업의 세습적 특성 때문에 주로 직업에서 유래했다. 가장 흔한 Smith는 대장장이(독일: Schmidt, 이탈리아: Ferrari), Taylor는 재단사(독일:Schneider, 이탈리아: Sartori), Bakers는 제빵사다.
이러다 보니 너무 같은 사람, 같은 성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의 경우에는 차별화를 위해서 이름에 본인이 다스리는 영지의 지명을 붙여 본인들의 신분을 표시했다. 예컨대, Otto von Bismarck → 비스마르크 지역 출신 귀족 오토.
물론 근대 초기로 넘어가면서 부르주아 평민도 지역명을 이름에 붙이기 시작했고, 특히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는 상인 귀족(gente nuova) 가문에서 지역이름을 붙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은 또 좀 다르고 복잡하다. 귀족(peerage)과 기사(knighthood)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Baronet은 13세기말~17세기 영국 왕권강화 시기, 왕실이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귀족 아래 계급이 돈을 내고 살 수 있었던 세습 기사 작위다. 여자는 Lady를 붙인다.
종신귀족(Life Peer)은 1958년 Life Peerages Act에 의해 도입된 현대적 귀족 제도로 세습귀족만 가능한 상원(House of Lords)을 개방하여, 사회 공헌자·정치가·법조인 등을 종신귀족으로 임명하고 상원의원직을 부여했다. 따라서 토지 소유와 무관하고 세습도 되지 않는다.
세습귀족(hereditary peer)은 1066년 노르만의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 함께 건너온 기사(knight)들과 장군(lord)들에게 대규모 토지를 나누어 주면서 만들어진 계층이다. 이들은 곧 영지 명을 딴 귀족 작위(Earl of Essex 등)를 받았고, 세습귀족(hereditary peer)이 된다. 이 귀족들은 지방 자치를 주관하고 군사를 모아 왕에게 바치는 봉건 제후들로 작위와 땅은 세습되며, 상원의원(Lord of House)이 된다. 그리고 이 세습귀족 전체를 총칭하여 Lord라고 부른다.
위와 같이 영국 귀족의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계층에 있는지, 어느 영지의 지주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이런 귀족 이름과 관련한 명대사가 나온다(2막 2장).
What’s in a name?
영국 귀족의 ‘이름에는 재산이 있다’, 달리 말하면 ‘재산에는 한 개의 이름’만 존재한다. 한 영토의 영주는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걸 영국에서는 귀족 남자들끼리 서로 묻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마도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의 학씨 아저씨의 명대사 “걔 뭐 돼?”의 영국판 대사가 아닐까?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에서는 줄리엣의 대사다. 줄리엣은 로미오와 무도회에서 사랑에 빠졌지만, 그가 자신의 집안과 원수인 몬테규 가문 소속(Romeo Montague)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1막 5장), 깊은 갈등 속에서 발코니에 서서 다음과 같이 혼자 말한다.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이름에 뭐가 있다고?(몬테규 가문, 영지?)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똑같이 향기롭잖아.
여기서도 장미가 나온다. ‘장미’라는 기호는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수많은 상징의 ‘기호’로 사용됨을 알 수 있고( “꽃”, “사랑”, “가시”, “피” 등),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처음 듣고 왜 제목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위 대사는 로미오가 몬테규라는 이름만 포기한다면, 둘의 사랑은 가능하다는 절절한 바람을 나타낸다.
그리고 줄리엣은 Capulet가문인데, 서로 ‘가문이라는 기호’를 버리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줄리엣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Deny thy father and refuse thy name;
Or, if thou wilt not, be but sworn my love,
And I’ll no longer be a Capulet.
(네가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 이름을 버려 줘.
그게 싫다면, 나를 사랑한다고 맹세해 줘.
그럼 나도 더는 카퓰렛이 아니야.)
위 대사들을 종합하면 이름에 붙어 있는 ‘가문-영지’라는 ‘기호’는 떼어낼 수 있으므로 ‘기호는 본질을 고정시킬 수 없고’(의미의 지연), ‘장미’라는 기호가 없다고 해서 장미의 향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기호는 불안정하며(기호의 불안정), 사랑을 금지하는 가문 중심주의가 결국 사랑의 열정 앞에 붕괴된다(자기 붕괴)는 언어·기호·의미의 불안정성을 드러내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를 연상시킨다.
이름은 성경에서, 성은 직업에서, 중세 유럽에는 같은 이름이 넘쳐나게 된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부칭)을 이름에 붙이는 관행이다. 영국에서는 부칭이 이름 안으로 흡수되어 버리고(Fitzgerald = Gerald의 아들(노르만 귀족), MacDonald = 도날드의 아들(스코틀랜드식)), 이탈리아에서는 di 뒤에 부친 이름을 붙여 썼다. 피렌체 메디치가에서 제일 성공했던 ‘로렌초 메디치’의 전체 이름은 다음과 같다.
Lorenzo di Piero de’ Medici il Magnifico
Lorenzo: 세례명(월계관을 쓴 자)
di Piero: 부칭(Patronymic) 피에로의 아들
de’ Medici: 가문명(메디치 가문)
il Magnifico: 별명(위대한 자)
* 참고로 러시아의 경우 이름에 부칭(obich, obna)이 법적으로 강제되고(러시아 연방 민법 제19조), 마찬가지로 귀족들은 지역명(ski)까지 붙는다. 러시아 문학작품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다(예컨대, 안나 카레니나의 남자 주인공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 백작).
그런데 중세~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혼외자인 서자들은 성을 쓸 수 없었다. 서자들은 중세 관습법으로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교회법에서 서자는 성직자가 될 수 없었고, 세속법에서 서자는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음. 예컨대, 영국의 1235년 머튼 법령(Statute of Merton)). 그래서 이들의 이름은 다른 방식으로 특정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성(姓)’ 대신에 동원되었던 게 바로 ‘동네 이름’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위에서 보았던 귀족들의 지역명과는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물론 서자만 동네를 붙였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서자’인 다빈치는 부칭인 “Leonardo di Ser Piero”를 못쓰고, “Leonardo da Vinci”가 된다. 풀어쓰면 ‘다빈치 동네의 레오나르도’.
여기서 유럽 르네상스를 공부하신 분들은 의문이 들 수 있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서자(illegitimate child) 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본명: 로드리고 보르지아(Rodrigo Borgia))의 성을 버젓이 쓸 수 있었냐는 점이다. 재미있는 내용이나 논점에서 벗어나고 깊은 이야기라 이 글 말미에 참고로 기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이름은 너무나도 풍부했다. 표의문자인 한자에 뜻을 담고, 철학이 담긴 성명학에 따라 정성 들여 작명을 했으니 서양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창의적이고, 다양했다. 그리고 이름과 성(姓)뿐만 아니라 조상이 정착한 지역인 본관(本貫, clan origin), 성인이 되고 공동체가 부여하는 공식 명칭인 자(字, courtesy name), 자기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적 명칭인 호(號, pseudonym)까지 있으니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는 유럽처럼 단순히 ‘남과 구별’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다층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호 체계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백범 김구는 다음과 같다.
자기가 손수 지은 호 백범은 ‘백성(白) 중 평범한 사람(凡)’이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성과 본관’은 대대로 물려받고,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고, ‘자(字)’는 스승/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어주고, ‘호(號)’는 자신이 짓는 아름다운 다층적 기호체계다.
나도 ‘호(號)’를 章廈(장하)라고 지은 것은 ‘빛나는 기호(章)’와 ‘고요한 구조의 전당(廈)’을 뜻한다. 장(章)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문학·과학·역사·법·철학·기호·신화 등 인류 지식의 조각들을 상징화하는 기호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의미의 리듬이다. 하(廈)는 그 기호들을 축적하여 구성된 거대한 정신의 건축물로, 글을 통해 세계를 다시 조형하고 해석하려는 존재의 의지를 표상한다.
章廈는 곧 “상징을 벽돌 삼아 의미의 궁전을 짓는 자”, 즉 다양한 지적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그 잔해로 새로운 인식의 구조를 창조하는 지적 건축가로서 내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한국과 달리 중세 유럽에서는 이름은 세례명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힘들고, 자신이 가진 귀족 영지, 가문이름, 동네 이름, 아버지 이름으로 남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이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이름이 이 정도 형편이면, 동물의 이름은 오죽할까? 이름을 가진 동물이 흔치 않았을 것이고, 있어도 동물은 세례를 받지 않으니 그냥 동물이 가지고 있는 ‘다른 비슷한 동물과 구분되는 특성’으로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말(馬)’은 중세에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었을 것이므로 아마도 호칭이 있었을 것이고, 그나마 구분되는 것이 색깔이었을 테니 “검둥이(Brunello)”, “빨갱이(Rosso)”, “하양이(Bianco)”, “까망이(Nero)” 등으로 불렸을 테다.
이것은 와인의 색과도 연결된다. Rosso는 보통 레드와인을 칭하고, Bianco는 화이트 와인을 칭한다. 예컨대, Etna Rosso는 시칠리아 에트나 지역에서 나는 레드와인을, Soave Bianco는 베네토 지방 소아베 마을의 화이트 와인을, Nero d’Vola는 시칠리아 마을 아볼라 지방의 까만 와인을 말한다.
이걸 한국 지명으로 의역하면, 와인의 이름이 "소공동 검둥이", "대치동 빨갱이", "목동 하양이", "중계동 까망이"가 될 터이니, 이 얼마나 촌스럽고, 창의성 0%의 무성의한 작명실력인지... 이런 이름 달고 한국의 와인이 해외로 수출된다고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혹시나 요즘도 어두운 색 강아지를 그렇게 부르지 않을까 싶어 인스타를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맞았다.
이제 내 가설을 정리해 보자. 이탈리아어에서 'Brunello'는 다른 것보다 '더 어둡고 짙은 색'을 가진 대상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윌리엄이 찾은 흔적 '검은 털 오라기’는 이 말이 다른 말들보다 현저히 어두운 색이고, 따라서 “가장 높은 확률의 말 이름은 ‘브루넬로’ 일 것이라고 윌리엄은 가설을 세웠다”는 것이 내 가설적 추리다.
그리고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이탈리아 와인의 명명법, 한국에 비교해서 형편없는 중세 유럽의 이름 문화를 살펴봤다. 와인에서도 색을 기준으로 Rosso(붉은), Bianco(흰), Brunello(어두운), Nero(검은)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 또한 동물에게 이름을 붙일 때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색과 같은 외형적 특징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에코의 4단계 귀추법에 적용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름을 추적하며 검증하던 중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통해 ‘장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상징의 힌트를 얻었다.
줄리엣의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똑같이 향기롭다"는 대사는 『장미의 이름』 마지막 문장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과 연결되어 ‘진리는 단일하지 않고 다층적’이며, 우리는 ‘실재(장미)에 직접 접근할 수 없고, 오직 이름(기호)만을 붙잡을 뿐’이라는 소설 전체의 주제와 통한다.
이제 에코의 4단계 귀추법을 적용해서 장미의 이름을 살펴보자.
3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