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5일,16일,18일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생하다.

by 지온x지피

원문

十五日甲辰。晴。以國忌不坐。修廵使答簡及別錄。卽令驛子馳送。日沒時嶺南右水使傳通內。倭船九十餘出來。釜山前絶影島駐泊。一時又到水使關。倭賊三百五十餘隻。已到釜山浦越邊云。故卽刻馳啓。兼移廵使,兵使,右水使處。嶺南方伯關。亦到如是。


4월 15일, 갑진일. 맑은 날이었다.

오늘은 나라의 큰 제삿날이라, 관청의 일을 잠시 멈췄다.

그 틈을 이용해 나는 순찰사(이광)에게 보낼 답장을 꼼꼼히 정리해 썼다.

또 다른 문서들도 정리해 급히 역마를 시켜 보냈다.


해가 저물 무렵,

영남 우수사(경상도 해안의 수군 지휘관 원균)에게서 긴박한 소식이 전해졌다.


“왜군의 배 90여 척이 부산 앞바다, 절영도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왜적의 배 350척 이상이 벌써 부산포를 넘어 상륙했답니다.”



곧장 임금께 보고하는 장계를 써 올렸다.

동시에 순찰사(이광), 병마사(최원), 우수사(이억기)에게도 급히 알렸고,

영남의 관찰사(김수)에게도 공문이 왔는데 같은 내용을 받았다.


나라가 공격받고 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적은 상륙했다.


원문

十六日乙巳。二更。嶺南右水使移關。釜山巨鎭。已爲陷城云。不勝憤惋。卽馳啓。又移文三道。


4월 16일, 을사일.

깊은 새벽, 두 번째 경각.

영남 우수사 원균에게서 급보가 도착했다.


“부산의 거진(巨鎭 지휘 군영)이 무너졌습니다.”




나라의 바다가 무너졌다.

그 땅엔 아직 백성들이 있고,

군사들이 있었다.


나는 애통함을 억누르며

곧장 임금께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삼도(경상,전라,충청)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전갈을 날렸다.


피로 쓴 전쟁이 시작되었다.



원문

十八日丁未。朝陰。早朝。出東軒公事。廵使關來到。鉢浦權管。已爲汰去。假將定送云。故羅大用卽日定送。未時。到嶺南右水使關。東萊亦爲陷沒。梁山,蔚山兩守。亦以助防將入城。並爲見敗云。其爲憤惋。不可勝言。兵使,水使領軍到東萊後面。遽卽回軍云。尤可痛也。夕。順天領軍兵房。留在石堡倉。不爲領付。故捉致囚禁。



4월 18일, 정미일.
하늘이 잔뜩 흐렸다.

이른 새벽부터 나는 동헌(지휘관의 업무를 보는 곳)에 나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살폈다.
잠시 뒤, 순찰사 이광이 보낸 급한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발포 권관이
이미 물러났기에, 새 장수를 급히 보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즉시 나의 믿음직한 부하인 나대용을
그날 바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오후 무렵,
영남 우수사 원균에게서 또 다른 비보가 날아왔다.

“동래성마저 무너졌습니다.
양산과 울산에서도 장수들이 왜적을 막기 위해 성으로 들어갔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숨이 턱 막혔다.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피가 끓듯 분노가 솟구쳤고,
슬픔과 원통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런데 더 믿기 힘든 소식이 이어졌다.
경상도의 군사를 지휘하는 최고 책임자들인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군대를 이끌고 동래성 근처까지 갔다가,
적과 싸우지도 않고 바로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나는 참을 수 없이 분하고 원통했다.

“전쟁터의 장수가 적을 눈앞에 두고 물러나다니,
이 무슨 비겁하고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인가.
내 어찌 이런 사람들과 나라를 함께 지켜야 하는가.”

저녁이 되자 또 다른 일이 터졌다.
순천에서 올라온 군사 담당자(병방)가 군사들과 함께
석보창(군사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는 명령대로 군사들을 제대로 이끌지 않고
시간만 끌며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전쟁 중이다.
단 하루의 지연도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였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군율이란 엄격한 법이다.







이각(李恪, ?~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 좌병사로,

경상도의 육군을 책임지는 군 지휘관이었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을 침공하자

이각은 병력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들어갔으나,

부산진이 함락되자 겁을 먹고 전투 없이 후퇴하였다.


이각의 무책임한 퇴각은 조선 수비망 붕괴를 가속화시켰고,

전국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이후 임진강 일대에서 체포되어,

전시에 책임을 저버린 죄로 참형을 당하였다.




그와는 달랐던 한 사람,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종4품)로서

부산 지역을 관할하던 지방 수령이었다.


경상 좌병사 이각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였지만,

그는 동래성을 사수하기 위해 끝까지 항전했다.


1592년 4월, 왜군이 동래성을 포위했을 때

송상현은 항복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군민들과 함께 성을 지켰으며,

결국 장렬히 전사하였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쉬워도,

나라를 배반할 수는 없다”는 말은

그가 남긴 정신을 오늘까지도 전하고 있다.


그는 무너지던 조선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은 충의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정발(鄭撥, ?~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발발 당시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

부산진의 군사 책임자였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를 기습하자

정발은 수백 명(약 300명)의 병력으로 성을 끝까지 방어했다.

그러나 왜군의 수(약 18700명)는 압도적이었고,

결국 성이 무너지며 정발은 전사하였다.


그는 성벽 위에서 창을 들고 끝까지 싸웠다고 전해지며,

죽기 직전까지도 백성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부산진의 함락은 조선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정발의 항전은 후세에 조선 수군과 의병의 불씨가 되는 데 기여했다.












참고 문헌

이순신, 『교감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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