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포해전(5승 1592년 6월 2일)
初二日庚子。晴。朝發直到唐浦前船滄。則賊船 二十餘隻列泊。回擁相戰。大船一隻。大如我國板屋船。船上粧樓。高可二丈。閣上。倭將巍坐不動。以片箭及大中勝字銃筒。如雨亂射。倭將中箭墜落。諸倭一時驚散。諸將卒一時攢射。逢箭顚仆者不知其數。盡殲無餘。俄而。倭大船二十餘隻。自釜山列海入來。望見我師。奔入介島
1592년 6월 2일, 당포 앞바다.
오늘 바다는 맑고 고요했다. 아침 일찍 군사들과 함께 출정하여 당포 앞바다까지 나아갔다.
적의 배는 스무 척 남짓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중 눈에 띄게 거대한 배 한 척이 있었다. 마치 우리의 판옥선을 보는 듯 웅장했고, 높이가 두 길(약 6미터)은 족히 되는 누각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누각 꼭대기에는 왜장 한 명이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처럼 꼿꼿한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조롱하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병사들에게 명했다.
"편전과 대중승자총통을 준비하라!"
우리의 작은 화살들은 바람을 가르고, 대포알은 우레처럼 터져 나가며 왜군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그 순간, 그 오만하게 앉아 있던 왜장의 몸에 정확히 화살이 꽂혔다. 왜장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다로 떨어졌다.
적들은 눈앞에서 지휘관이 쓰러지자 공포에 휩싸여 흩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우리 병사들과 장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배 위의 왜군들이 셀 수 없이 바다로 떨어졌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바다는 고요하지만 처참했다. 한순간의 전투가 끝난 자리엔 조각난 배와 왜군의 흔적만이 물결 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부산 방향에서 또 다른 왜군의 전함 스무 척이 몰려온다는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 함대를 보자마자 싸우지도 않고 급히 개도(介島) 안쪽으로 피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승리를 거두었지만 내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건 이 나라와 백성의 평화이지, 결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싸움이 언젠가는 끝나기를, 이 피로 물든 바다가 다시 평화로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는 다시 배의 방향을 돌렸다.
당포 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맞서야 했던 적장의 배는
마치 조선의 판옥선과 맞먹는 크기와
위로 치솟은 높은 누각을 가진 대형 전투선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기록 속 그 배는,
오늘날 '안택선(安宅船)'으로 불리는 일본의 대표적 사령선이다.
안택선은 일본 수군의 지휘를 담당하던 대형 전투선으로,
배 위에는 가옥 형태의 누각이 설치되어 있어
지휘관이 머물거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사용되던 대부분의 안택선은
조선의 판옥선보다 크기가 더 컸고,
가벼운 삼나무로 제작되어 항해가 빠르고 장거리 운항에 유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치명적인 약점도 안고 있었다.
삼나무의 가벼운 구조는
대포를 쏘았을 때 발생하는 진동을 견디지 못해 불안정했고,
총통(화포)의 사정거리와 정확도 역시 조선 수군의 함포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일본군은 화포를 고정하는 기술도 부족해
돛줄에 포를 묶은 채
여러 명이 함께 붙잡고 쏘아야 했고,
발사 속도 역시 매우 느렸다.
그래서 이들은 해상에서는 백병전에 의존했고,
항상 적함에 빠르게 접근하여 칼을 뽑는 전술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런 전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병력도 부족했고,
배의 숫자도 일본보다 턱없이 적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
항상 가장 먼저 준비했고,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부터
1597년 억울하게 파직되기까지,
그는 조선의 주력선인 판옥선을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 본문에 언급된 '안택선'에 대한 설명은
황현필 작가의 『이순신의 바다』를 참고해 정리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왜군의 지휘관, 즉 적장은
오랫동안 가메이 고레노리로 여겨져 왔다.
이는 전투 이후, 현장에서 가메이 고레노리의 금부채가
전리품으로 발견되어 조선군에 의해 회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가메이 고레노리는 전투 이후에도 살아남아
일본으로 귀환했으며 1612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역사학계에서는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적장을
구루시마 미치유키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