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은 피라미드를 쌓았다

by 노경문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은 누구를 부리고, 누구는 부림을 당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를 쌓던 노예들은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을까.
아득한 모래바람 속,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매일 돌을 나르던 그들은,
어쩌면 분노했고, 어쩌면 체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고된 시간 속에서도,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동료의 등을 토닥이며 견뎠다.

그들이 쌓은 것은 돌뿐만이 아니었다.

힘으로 눌려도 사라지지 않는 숨결,
하루하루를 견뎌낸 기억,
그리고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는 끈질긴 마음이,
거대한 구조물처럼 포개져 있었다.

수천 년을 지나, 조선 시대.
신분이 혈통으로 고정된 세상에도 노비는 있었다.
노동은 의무였고, 복종은 삶의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살지는 않았다.
어떤 이는 장사를 시작했고, 어떤 이는 글을 배워 서얼이 되었으며, 어떤 이는 소작지를 모아 조심스레 자신의 땅을 넓혀갔다.

법과 제도가 그어놓은 틀 안에서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작은 균열을 찾아나갔다.
굴복하지 않고, 미세하게 방향을 튼 삶들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짧은 글 하나가 있었다.

대형 카페의 알바생이 퇴근할 때마다 사장 딸을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부탁이었지만, 곧 당연한 일이 되었고, 고맙다는 인사조차 듣지 못했다.
딸은 조수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아 다리를 꼬았고, 그는 핸들을 꽉 잡았다.

일의 강도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지만,
그 가벼움 위에 얹힌 감정은,
피라미드를 끌던 노예의 한숨과,
조선의 노비가 숨죽이며 삼켰던 무력감과 닮아 있다.

그가 느낀 모욕감은 단순히 수고에 대한 보상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돈이 충분하더라도 꺼림칙한 일은 꺼림칙하게 남는다.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노동'이 아니라, '관계'였다.

만약 그가 데려다준 사람이 어린아이였다면, 보호자의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노인이었다면, 예우의 마음으로 납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나이, 같은 출발선에 있어야 할 존재를,
고마움조차 표하지 않는 채 데려다주는 일은,
나와 너 사이에 있어야 할 대등함을 무너뜨렸다.

이것은 단순한 심부름이 아닌,
존엄의 균열이었다.

한 댓글은 말했다.
"자존심에도 가격이 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자존심이 상한다면, 그 대가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맞는 말이다.
감정까지 포함해 스스로를 값으로 환산하며 견디는 것이 삶일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돈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대가를 받아도, 불쾌함이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자본주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미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돈이 오가는 시장 속에서도,
존엄과 불평등에 대한 감정은 형태를 바꿔 여전히 살아 있다.
돈으로 고용 계약은 맺을 수 있어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여전히 마음 깊숙한 균열을 남긴다.

억울함은 시대를 넘어 이어진다.
그러나 억울함만으로 삶은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도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작은 장사를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또다시 핸들을 잡는다.

쌓아올리는 것은 단지 구조물이나 성과가 아니다.
어쩌면 견뎌낸 하루하루,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는 버팀이야말로
인간이 진짜로 쌓아온 것이었을지 모른다.

시간은 흘러도, 인간은 여전히 그 작은 자존을 지키기 위해 숨을 고른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누군가 이 시대를 돌아볼 때,
지워진 이름들 대신, 남겨진 숨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숨이 꺼진 자리 위에 길을 만들며,
우리는 그렇게 또 하루를 쌓아간다.

화,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