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그런 게 당연했다.
아침마다 조회를 하고,
모두가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조국’이라는 말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아도
가슴속에서 자연스럽게 울리던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애국가는 체육대회에서도 틀지 않는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생략하고,
‘조국’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민망해진다.
애국심은 이제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하는 감정이 되었다.
자랑이 아니라, 설명해야 하는.
때론 조롱을 감수해야만 지킬 수 있는 감정으로 말이다.
그 감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는 이제 점점 많아지고 있다.
2024년, 한국의 장교와 부사관 10명 중 6명이
“군인이라는 직업을 지인에게 추천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국가가 위험하다면 나서겠다”는 대답도
해마다 줄더니,
이제는 10명 중 4명도 안 된다.
군인이 군대를 말리는 사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지금 정신적 비상상태에 있다.
군대는 사명감으로 유지되는 조직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는,
그 사명감이 감정소비처럼만 다뤄지고 있다.
군인만 그런 게 아니다.
간호사, 교사, 소방관, 공무원...
국가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호출되는 직업들 속에서
하나같이 “이 직업을 추천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은 이렇게 번역된다.
“이건 헌신의 대가가 없는 자리입니다.”
“여기선 나만 다칩니다.”
나는 민방위다.
전쟁이 나면 징집 가능한 나이다.
누가 나에게 “그땐 나가서 싸울 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나는 망설이다... 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가 내 헌신을 기억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와이프에게 해봤다.
“혹시 내가 징집되면, 어떡하지?”
그녀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절대 나가지 마.”
그 말엔 분노도, 조롱도, 감정도 없었다.
그건 그냥.. 지금 이 시대의 평범한 대답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애국심은 강요할 수 없다고.
지금은 개인의 시대고, 자유의 시대라고.
다 맞다.
하지만 애국심이 사라진 사회는
개인조차 지켜주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니라,
“이 공동체가 나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해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깨지면,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도, 더 이상 국가일 수 없다.
애국심은 맹세가 아니라 기억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회는 누구의 숭고함을 기억하고 있을까.
대전의 한 중학교에선 조리원들이 병가를 내고 급식이 끊겼다.
“사골을 삶지 않겠다”, “튀김은 주 2회까지만 하겠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신호다.
그들의 퇴사율은 60%.
정규직은 아니지만, 사실상 공공 시스템을 떠받치는 자리에서
10명 중 6명이 떠난다는 것은,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구조적 경고음이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아이들을 볼모로 삼지 마라”였다.
시스템은 고치지 않고, 책임은 또다시 개인에게 전가됐다.
파업을 선택하게 만든 구조,
그 구조를 방치한 행정,
그 갈등을 부추긴 언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무 문제 없이 반복하게 만든 제도.
그것이 이 사태의 본질적인 가해자다.
우리가 조국을 위해 나서지 않는 건,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의 헌신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감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존중과 지속 가능성 위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건 단지 군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상태다.
국가는 책임지지 않고,
사회는 감정 없이 흘러가며,
모든 짐은 결국 개인의 어깨에 쌓인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는
어떤 체계를 걸쳐도 결국 무너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용히 말한다.
나도 안 갈 거라고.
내 자식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애국심 없는 군대,
사명 없는 교실,
보람 없는 병원,
헌신 없는 조국.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국가라는 감정의 기반을 지워가고 있다.
그 말을 쉽게 뱉지 못해도,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나처럼.
그냥... 못 간다.